[민은미 더봄] 여름에는 금을 못 끼고, 겨울에는 옥을 못 끼는 가락지 이야기
[민은미의 보석상자] (21) 비녀와 함께 외할머니의 상징물로 기억 그 외할머니가 생각나 구입한 옥가락지
몇 해 전 옥가락지를 산 적이 있다. 서울 종묘 인근에 있는 옥으로 만든 전통 장신구를 판매하는 가게에서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복을 일상복으로 입으시던 나의 외할머니가 사용하던 낯익은 물건인 비녀, 노리개, 반지 등이 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주얼리를 좋아하고 관심이 많았지만, 전통 장신구를 구입한 것은 처음이었다. 순전히 외할머니 덕분이었다. 금비녀를 꽂은 쪽머리로 평생을 살았던 나의 외할머니. 비녀 외에 할머니가 늘 몸에 지니던 것이 바로 가락지다.
가게에는 백옥, 비취, 은으로 된 다양한 종류의 가락지가 있었다. 그중에서 나는 백옥으로 된 가락지 하나를 구입했다. 외할머니 손에 있던 그 가락지가 생각나서였다.
1999년, 84세로 유명을 달리한 외할머니의 손가락에는 항상 두 짝으로 된 황금색 가락지가 끼워져 있었다.
가락지
안은 판판하고 겉은 통통하게 만든 손 장신구용 고리가 가락지다. 고리가 하나로 된 것은 ‘반지’, 두 짝의 고리를 ‘가락지’라고 한다. 지환(指環)은 가락지와 반지의 총칭이다. 흔히 ‘쌍가락지’라는 표현을 쓰는데, '쌍'이라는 단어를 붙이지 않아도 가락지는 이미 두 짝을 뜻하니 쌍가락지는 잘못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반지는 미혼·기혼을 가리지 않고 아무나 끼지만, 과거 가락지는 기혼녀가 끼는 것이었다. 재료는 금·은·구리·옥·비취·호박·마노·밀화·산호·진주 등을 사용한다. 재료에 따라 겉을 꾸밈없이 민자로 하기도 하고, 문양을 세공하기도 했다.
기혼녀가 가락지를 끼는 것은 유교 사회였던 조선시대 혼례 관습 때문으로 보인다. 혼례를 인간 대사의 하나로 삼고 가락지를 이성지합(二姓之合)과 부부일신(夫婦一身)을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조선시대 상류 사회나 궁중에서는 계절과 의상에 따라 다른 재료의 가락지를 끼었다. “가락지는 10월부터 정월까지 금지환을 끼고, 2월과 4월은 은칠보지환(은 소재에 칠보 장식한 반지)을 낀다. 5월 단오 견사당의(絹紗唐衣)를 입을 때에는 옥지환이나 마노지환을 낀다. 또 8월 한더위에는 광사당의(光紗唐衣)를 입을 때에 칠보지환을 끼어 9월 공단당의(貢緞唐衣)를 입을 때까지 계속한다. 규칙이 이러하니 여름에는 금을 못 끼고, 겨울에는 옥을 못 끼나 춘추에는 옷에 따라 마음대로 낀다.”
《사절복색자장요람(四節服色自藏要覽)》에 등장하는 기록이다.
외할머니의 금가락지
내가 기억하는 외할머니의 가락지는 누런 황금으로 된 가락지였다. 할머니의 큰딸인 나의 엄마가 선물했던 반지였다고 한다. 순금 5돈으로 된 금가락지였는데, 엄마는 할머니에게 좋은 장신구를 해드리고 싶어 4자녀의 백일, 돌 때 선물로 들어온 금반지, 금팔찌를 하나 둘씩 팔아서 비녀, 가락지, 브로치 등을 만들어 할머니께 드렸다고 한다. 연세가 드신 후에는 손마디가 굵어져서 반지가 빠져 나오지 않았다.
외할머니의 손에 항상 있던 그 금가락지. 손녀인 나에게는 외할머니하면 떠오르는 상징물이다. 지금은 남아 있지도 않는 금가락지다. 하지만 딸의 정성과 사랑이 담긴 반지의 추억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던 7월말 한여름 무더위가 찾아오면 나는 옥가락지를 찾아서 끼곤 한다. 벌써 몇 해가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