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재 칼럼] 정치적 어젠다 매몰된 연준, 스태그플레이션 초래
[김성재의 국제금융 인사이트] 물가 안정이라는 정치적 목표에만 매달릴 경우 커지는 경기 침체 가능성
1932년 겨울 미국 뉴욕주의 레이크 플래시드에서는 제3회 동계올림픽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올림픽에 참가한 17개 국가의 명단에 스포츠 대국 소련은 없었다. 1917년 10월 혁명으로 수립된 이 나라는 스탈린의 명령으로 경제개발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1928년부터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산업의 중공업화와 농업의 집단화를 추진했다. 공산주의 특유의 계획경제가 가동되면서 국가 내 온갖 자원이 이 계획의 성공에 총동원되었다. 그로부터 5년간 전체 산업생산은 50% 늘어났고 중공업 부문의 생산은 거의 5배나 증가했다.
대공황으로 신음하고 있던 미국과 유럽에서는 경이로운 성장을 보이는 소련 경제에 대한 예찬론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독일에서는 히틀러의 나치가 지지세를 넓히고 있었다. 2019년에 개봉한 영화 ‘미스터 존스(Mr. Jones)’는 이 시기 영국과 소련을 배경으로 한다.
영국 웨일즈 출신으로 우크라이나에서 교사로 재직한 적이 있는 어머니 덕분에 러시아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20대 후반의 언론인 ‘개럿 존스(Gareth Jones)’는 로이드 조지 전 영국 총리의 외교 담당 보좌관이었다. 국제정세의 중요한 변화에 민감했던 존스는 1933년 초 히틀러와 괴벨스를 인터뷰하고 독일에서 나치의 열광적인 등장을 알렸다.
그해 3월 존스는 스탈린을 취재하려는 열망을 안고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로 향했다. 공산화가 진행된 지 15년이 지났지만 모스크바의 화려함은 그대로였다. 또한, 미국에서 영향력이 막강한 뉴욕타임스 특파원으로 모스크바에 거주하던 월트 듀런티(Duranty)와 그의 동료들이 보여주는 사치와 향락에 존스는 큰 충격을 받는다.
그런데 거기서 만난 독일 언론인 ‘아다 브룩스’로부터 그가 만나고 싶어했던 또 다른 독일 언론인이 우크라이나에서 대기근이 발생했다는 소문을 취재하려다 의문의 사고를 당해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는다. 이에 우크라이나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호기심이 있었던 존스는 여행을 가장해 기차를 타고 가던 도중 탈출한다. 우크라이나로 잠입하기 위해서였다.
그곳에서 존스가 목격한 것은 듀런티와 같은 어용 언론인에 의해 전해지던 소련의 풍경과는 너무나도 대비되는 지옥도였다. 여기저기에 아사한 시신이 뒹굴고 있었다. 심지어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카니발리즘까지 행해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스탈린의 공산당은 곡창인 우크라이나의 곡식을 빼앗아 중공업 단지로 실어 나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극도의 공포와 충격 속에 소련군에 체포된 존스는 로이드 조지의 추천서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채 영국으로 돌아온다. 그가 우크라이나에서 목격한 홀로도모르(Holodomor, 대기근)를 보도하려 하지만 듀런티와 손잡은 유력 언론들은 그를 거짓말쟁이로 몰아 버린다.
결국 베를린으로 돌아간 ‘아다’의 도움으로 유력지 ‘파이낸셜 뉴스’에 대기근과 허구에 가득 찬 소련의 실상을 보도해 공산주의에 대한 경종을 울린다. 존스와 친했던 조지 오웰은 그와의 대화에서 영감을 받아 ‘동물농장’을 저술한다. 그러나 소련을 선전해 퓰리처상까지 수상했던 듀런티는 그 후에도 승승장구한다. 존스는 취재 중 몽골에서 서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이처럼 국가 권력이 개입되어 한 가지 목표를 향해 앞뒤 돌아보지 않고 총력을 다해 자원을 집중할 때, 국가는 수치로 표시되는 목표를 달성하겠지만 그 국가의 다른 곳에서는 몇백만 명이 아사하는 비극이 발생한다. 이런 이유로 국가 권력은 견제되어야 하고 주기적으로 그 성과에 대하여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그 정책 결정이 국민의 일상생활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면서도 성과에 대해서는 심판을 받지 않는 조직이 있다. 바로 중앙은행이다. 사실 대부분의 국가에서 권력을 가진 집권층은 방만한 재정 운용을 통해 지지 기반을 넓히고자 한다. 세금을 거둬도 부족한 재원은 돈을 찍어내거나 국채를 발행해 메운다.
역사는 이렇게 화폐와 빚을 남발한 국가들은 거의 예외 없이 초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으로 고통을 겪고 종국에는 멸망으로 향했음을 보여준다. 한때 세계를 제패했던 로마제국과 원나라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이 그랬다.
이런 교훈으로부터 화폐 발행을 일원화하고 통화량을 제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 중앙은행이다. 물론 금융위기가 발생해 은행이 유동성 위기에 빠지면 중앙은행은 발권력을 이용해 은행을 구제하는 최종대부자의 역할도 맡는다. 은행들의 은행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돈과 금융시스템을 관리하는 막중한 책무 때문에 중앙은행에는 정치적 독립성이 부여되었다.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도 마찬가지다.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연준의 통화정책은 정부와 독립된 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투표로 결정된다.
정부가 원한다고 하여 백악관이나 재무부 관리가 연준에 전화하여 금리를 내리라고 명령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독립성의 보장이 연준이 자발적으로 정치화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다. 연준의 정치화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제10대 연준 의장인 아더 번즈(Arthur Burns)다.
1969년에 대통령에 취임한 리처드 닉슨은 매파인 윌리엄 마틴을 연준 의장 자리에서 내쫓고 그 후임으로 자신의 백악관 보좌관이었던 번즈를 임명했다. 1972년 여름 3%에 미치지 못하던 인플레이션율이 1973년 봄 5%를 넘어서자 번즈는 기준금리인 연방기금금리를 4%대 후반에서 7% 위로 올렸다. 그럼에도 인플레이션율이 8%에 달하자 금리를 두 자릿수로 올렸다.
그런데 그해 겨울 경기가 침체에 빠지자 금리를 다시 8%대로 내렸다. 설상가상으로 그 와중에 욤키푸르 전쟁이 중동에서 터졌다. 오일쇼크가 세계 경제를 강타하면서 1974년 7월 인플레이션이 11.5%로 수직 상승했다. 결국 번즈는 금리를 13% 근처로 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그해 11월 12.2%로 정점을 찍은 뒤 이듬해 5월이 되어서야 한 자릿수로 내려왔다. 하지만 번즈는 경기침체의 공포에 질린 닉슨의 압박에 굴복해 물가가 아직 정점에 이르기도 전인 그해 8월부터 금리를 급격하게 내렸다. 1975년 5월 기준금리는 이미 5% 초반까지 하락했다.
오일쇼크의 여파가 가라앉으며 인플레이션이 1976년 말 5% 선까지 안정되었다. 번즈도 금리 인하를 지속했다. 이 시기 기준금리는 4.6% 선까지 하락했다. 그 영향으로 시중 금리에서 물가상승률을 공제한 실질금리가 마이너스가 됐다. 실질금리는 1974년 초부터 마이너스로 돌아선 뒤 그해 9월부터 마이너스가 고착화됐다. 그전에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현상이었다.
실질금리는 번즈가 물러나는 1978년 초가 되어서야 플러스로 돌아설 수 있었다. 1978년 이전 마이너스 실질금리는 연준이 물가 상승 속도보다 늦게 금리를 올리고 물가 하락 속도보다 빠르게 금리를 내렸음을 보여준다. 이런 방만한 통화정책의 운용으로 물가는 결코 5% 아래로 안정되지 않았다. 일관성 없는 정책으로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가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7년부터 슬금슬금 다시 오르기 시작하던 물가는 1979년 3월에는 다시 두 자릿수 오름세로 진입했다. 거기다 이란 위기가 겹치면서 1980년 봄에는 15%까지 급등했다. 물론 1970년대의 인플레이션에는 두 차례의 오일쇼크가 큰 영향을 끼쳤다. 그렇다고 하여 물가상승의 원인을 공급측 요인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1971년부터 1977년 말까지 M2 통화량이 연평균 10% 증가했기 때문이다. 1971년 닉슨이 달러를 금으로 교환해주는 금본위제도 포기를 선언하면서 브레튼우즈 체제가 붕괴했다. 그로 인해 정부의 재정운용이 방만해지면서 나랏빚이 급증했다. 통화량도 따라서 급격히 늘어났다.
그 후 통화량은 대체로 한 자릿수 증가세를 보였다. 2017년 가을부터 2019년 여름까지 연준이 양적긴축(QT)에 나설 때는 통화량 증가율이 5%에도 미치지 않았다. 그런데 2020년 3월 이후 통화량의 두 자릿수 증가가 40년 만에 다시 고착화했다. 팬데믹 기간 경기부양을 위해 재정지출이 급격히 늘어났고 연준이 공격적인 양적완화(QE)를 통해 돈을 풀었기 때문이다.
2020년 3월부터 2021년 말까지 연평균 통화량 증가율은 무려 19%로 1970년대보다 9%나 높았다. 통화량 증가율은 연준이 양적완화를 그만둔 금년 3월에야 한 자릿수로 내려왔다. 문제는 작년 6월 인플레이션이 위험 수준인 5%를 이미 넘어섰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연준이 양적완화를 지속하면서 통화량을 두 자릿수로 늘인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연준이 정치화되었었기 때문이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경기침체의 완전한 극복과 인종별, 성별, 계층별 소득격차의 완화라는 민주당 정부의 진보적 어젠다에 적극 호응했다.
물가 안정이라는 중앙은행 본연의 목표보다는 경기 회복이라는 친정부적 어젠다에 더 부합하려 했다. 그 결과는 40년 만에 두 자릿수 상승을 목전에 둔 최악의 인플레이션이었다. 물론 팬데믹 기간 공급망 붕괴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물가 상승을 더 부채질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물가 앙등의 씨앗은 연준이 정치화하면서 이미 뿌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제 바이든 정부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어젠다가 물가 잡기로 바뀌었다. 높은 물가로 지지율이 곤두박질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자 연준도 모든 포커스를 인플레이션에 맞추기 시작했다. 물가를 잡기 위해서라면 숱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어떤 수단이라도 동원할 태세다.
그렇다면 금리를 점보 스텝으로 올리고 양적긴축으로 통화량을 조이면 어떤 부작용에 맞닥뜨리게 될까? 주식, 부동산, 가상화폐 등 거의 모든 자산시장이 붕괴를 맞을 가능성이 크다. 금리 인상으로 시장 유동성이 마르고 소비와 투자가 위축되어 경기가 침체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금융시스템에 대한 위기도 가중될 것이다. 연준이 이 모든 비용에도 불구하고 초고강도 긴축을 하는 까닭은 성급히 목표를 달성하려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도 또한 바이든의 정치적 사이클이 영향을 미치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있다. 그 목표가 경제적인 것이라면 당연히 기회비용을 감안해야 한다. 정치적 어젠다에 매몰된 연준의 무리수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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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재 가드너웹대학교 경영학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