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정 더봄] 은퇴 후 대학원생이 되었다 (1)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 "이제 와서 공부해서 뭐하게?" "천만에! 놀기 최고봉은 공부"
‘원초적 놀기 본능’이라는 타이틀로 3년 동안 글을 썼더니 어느덧 ‘놀기’가 나의 정체성이자 브랜드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사람들은 처음에 내게 엄청 재미있는 놀이 비법을 기대했는가 보다. 첫 글부터 ‘은퇴 부부의 해외 한 달 살기’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내 실망했을 것이다. 나는 놀이 전문가가 아니다. 평생 잘 놀아본 기억이 없고 골프나 노래 같은 잡기에도 소질 없다. 여행은 많이 다니지만 혼자 즐기기에도 바쁜 터라 숙제하듯 여행기를 써서 제공할 생각은 없다.
그러니 신나게 노는 이야기를 떠벌려서 부러움과 시샘, 나아가 악성 댓글까지 고스란히 떠안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저 남보다 몇 년 이르게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그동안 하고 싶던 일을 하면서, 어떻게 해야 몸과 마음이 시달리지 않고 가장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유지될까 생각하다가 찾아낸 단어가 ‘놀기’였을 뿐이다. 이 연재의 서문이 될 이야기는 이쯤에서 줄이자.
회사를 그만둔 지 6년, 요즘 나의 ‘놀기’는 새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동안 이것저것 분주히 하면서 나름대로 자유의 단맛을 느껴봤는데, 작년부터 스스로를 옥죄는 생활로 되돌아가 현역시절의 긴장감을 다시 느끼고 있다. 전북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서양사 공부를 시작해서 두 학기째 로마 속에서 산다. 서류 더미에 파묻혀 살던 내가 '로마의 휴일' 속 오드리 헵번의 상대역을 꿈꾸게 하는 로마로 들어올 줄 몰랐다. 로마를 알아가는 일은 아주 재미있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내린 결론인데, 노는 방법 가운데 가장 효율 높은 것은 역시 공부다. 진리를 깨우치는 즐거움까지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시간이 잘 가고, 따로 친구가 필요 없다. 새로 알아가는 것들이 신기하고 재미있고 보람차다. 돈이 적게 들고, 남들이 보기에도 모양새가 나는 것 같다. 문제는 공부와의 궁합인데, 글쎄…. 나는 지금껏 공부를 좋아해 본 적 없다. 필요할 때 딱 필요한 만큼만 했다. 그런데 조금씩 관심 두던 분야에 점점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어느 순간 남은 시간을 쏟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직할 때는 ‘앞으로 5년이면 새로운 길 위에서 뭔가 이루어놓을 수 있겠지’ 싶었지만, 아이템 선정에만 5년 걸린 셈이다. 하지만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게 뭔지 찾아낸 것은 행복한 일이다.
대학원 공부는 생각처럼 그리 만만치 않았다. 직장 시절에는 회사 지원으로 경영 쪽 석사 학위를 밟는 부지런한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남의 일이라 그런지 별로 힘들게 보이지 않았다. 그 영향으로 나도 모르게 대학원을 쉽게 생각했는가 보다. 그렇지만 대학 때 전공과도 다르고, 공부와 떨어져 산 지 수십 년이다.
교수님들은 인기가 바닥까지 떨어진 인문학을 하겠다고 찾아온 중년의 신입생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분들 말씀을 종합해보면, 인문학은 꼼수 부려가며 쉽게 공부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기야 누가 부른 것도 아니고, 내 발로 걸어들어왔으니 타협의 여지를 생각하지 않고 요즘 오로지 책만 붙잡고 있다. 그러다 보면 별로 한 것 없이 시간이 훌쩍 간다. 꽃 구경하러 나들이 잠깐 나가는 것도 부담스러울 정도다. 그런데, 퇴직 후 시간 여유가 많을 때 놀던 것보다 이렇게 바쁠 때 조금씩 노는 게 훨씬 더 재미있기는 하다. 시험 기간만 되면 책상 서랍 정리하고 싶어지고, 회사에서도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을 때 외부 행사에 차출되어 나가는 게 은근히 재미있었던 것처럼.
가끔 공부가 질릴 때, 어머니께 전화해서 엄살 부린다. 공부하느라고 너무 바쁘다고. 그러면 어머니는 40년 전처럼 “힘들어도 열심히 해라. 우리 아들 장하다” 하실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그동안 애썼으면 좀 쉴 것이지. 인제 와서 공부는 뭐 하러 해?” 또는 “지금부터 하면 몇 살에 교수가 되는 거냐?” 하신다. 뼈가 있는 농담이다. 학문? 그건 할 사람이나 하는 거고, 우리 어머니들이 그렇게 공부하라고 닦달했던 건 결국 험한 세상 살아갈 자식들 걱정 아니었던가.
오랫동안 잊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고3 때, 늦게까지 자율학습하고 들어와서 자정쯤 방에서 펄 벅의 『대지』를 재미나게 읽고 있었다. 갑자기 어머니께서 과일을 가지고 들어오셨을 때 책을 책상 아래로 후다닥 숨겼다. 열심히 공부해도 모자랄 판에 부모님 실망시킬까봐 그랬나보다. 아마 내 어색한 표정을 눈치채셨을 테고, ‘이놈이 이상한 것 보는가 보다’ 생각하셨을 것 같다. 옛날의 공부는 그랬다. 이제 좀 마음 놓고 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