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석파정 옆 근현대 걸작전···컬렉터 사연도 '묵직'
설립자, 장애와 여성에 특별한 수집 애정 주인 바뀐 ‘아침의 메아리’···“자주 선뵌다”
이중섭·김환기·임직순·천경자·김기창 등 미술 교과서에서나 볼 법한 한국 근현대 걸작이 한 자리에 모였다. 소장품으로만 구성된 서울미술관 기획전 ‘두려움일까 사랑일까 Fear or Love’에선 설립자 안병광 회장의 수집 열정과 철학이 드러난다.
흥선대원군 별장인 ‘석파정’을 품은 미술관으로 유명한 부암동 서울미술관은 의약품 유통에 몸담았던 안병광 회장이 2012년 설립했다.
이번 전시는 개관 이래 최대 규모로 기획됐다. 한국 근현대 작가 31명의 주요 작품 140점이 모인 만큼 구성도 다채롭다. 기자가 방문한 현장에선 100호부터 300호까지 이르는 대형 작품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서울미술관에 따르면 안 회장은 이번 전시 기획에 직접 참여했다. 그의 소장품으로 구성됐기에 애정도 대단했다. 그의 수집 이야기는 각 작품과 함께 ‘수집가의 문장’으로 나타난다.
안 회장은 기획의도에 대해 “개관 후 3년간 34억원 적자가 나는 등 미술은 늘 ‘두려움’과 ‘사랑’의 대상이었다”며 “저에게 수집은 눈에 보이지 않는 길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관람객에게도 서울미술관이 문턱이 낮은 미술관으로 비추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번 전시는 '수집가 문장'을 담아낸 점이 이색점이다. 컬렉터의 수집욕은 장애·여성 등 당대 주류에서 벗어난 곳으로 향했다. 운보 김기창 화백·천경자 화백·임직순 화백 컬렉션에서 그 속내를 알 수 있다.
1부에서 처음 만날 수 있는 넓은 공간엔 운보 김기창의 그림이 모였다. 운보 김기창은 8세 때 장티푸스로 청각 장애를 안고 구화로 소통하면서 활동한 화가다. 전통 채색화뿐 아니라 일본화·서양화·민화의 변주까지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전시된 작품수만 11점. 운보의 넓은 작품 세계도 안 회장 컬렉션에 그대로다. 안 회장은 운보에게 특별한 애정을 과시했다. 1998년 IMF 시기 안 회장은 운보의 ‘예수의 생애’ 30점 연작을 구매했다. 평소 애정이 있었기에 주저도 없었다. 30점 전체 그림 값은 당시 물가로 빌딩 두 채에 버금갔다.
안 회장은 수집가의 문장을 통해 “삿갓을 쓴 전통의 모습으로 예수를 표현한 김기창 화백의 그림은 200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해 독일 역사박물관에 초청돼 전시되기도 했다”며 “저는 운보를 오케스트라 지휘자에 비유한다. 단연 대한민국 최고 화가로 운보 김기창을 꼽고 싶다”고 밝혔다.
여성 작가와 여성 소재에 대한 수집욕도 드러났다. 천경자 화백과 임직순 화백의 그림에서다.
천경자 화백은 세계 각지를 누비며 겪어온 외로움과 아픔을 이국적인 화풍으로 드러낸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된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작품도 아프리카 초원에 자신의 49세 시절을 투영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미술 평단에선 그림 속 코끼리 위 쪼그려 앉아 슬픔에 젖은 여인은 천경자 화백 자신으로서, 내면의 잠재된 슬픔이 드러난작품이라고 해석한다.
그림의 주인인 안 회장도 이같은 슬픔에 공감했다. 그는 “자신을 어렵게 했던 환경을 극복하려 했던 의지가 화폭에서도 느껴진다. 오래도록 갈망하던 이 작품을 미술시장에서 만난 순간을 잊지 못한다”며 “코끼리 등 위에 앉은 여인이 마치 생에 대한 몸부림처럼 느껴져 감동을 느꼈다”고 밝혔다.
임직순 화백의 그림도 7점 선보였는데 그중 4점이 임직순 화백이 주로 그렸던 ‘소녀’ 소재를 포함한다. 그림엔 명상에 잠긴 듯한 소녀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담겼다. 임직순 화백은 작가노트를 통해 “생전 꽃과 여인을 즐겨 그린 이유는 아름다움에 가린 생명의 힘에 이끌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화려한 작품세계에도 불구, 작품이 미술시장에서 큰 인기를 구가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 시기 안 회장은 경매에서 유찰된 ‘소녀’를 처음 손에 넣었다. 그 이후론 1000만원을 더 준다 해도 팔지 않았다. 수집가의 시선에선 해외 명화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작품이었다. 안 회장은 2018년 한 칼럼을 통해 “임직순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그가 꿈꾸는 생명에 대한 간절한 기도가 느껴진다”며 “색채는 화려해 기분을 들뜨게 하지만 소녀의 모습은 오솔길처럼 차분하다”고 밝혔다.
이시연 서울미술관 큐레이터는 여성경제신문과 인터뷰에서 “수집가 입장에서도 작품 한 점 한 점에 드러난 가치들이 매력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천경자 화백과 임직순 화백 두 분 모두 아름다움으로 표상된 여성의 이면을 드러내보였던 작가”라며 “겉으로 보이기에 예쁜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강인한 생명력이나 자전적인 성격을 담아냈다”고 말했다.
‘아침의 메아리’ 새 주인 서울미술관
“청각·시각 모두 한 폭에”
대미는 고가의 대형 작품이었다. 김환기 뉴욕 시대 대표작인 ‘아침의 메아리 (Echo of Morning) 04-VIII-65’다. 2021년 서울미술관은 해당 작품의 새 주인이 됐다. 주인이 바뀐 뒤론 최초 공개된 작품으로 작품 가액이 100억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1977년 (김환기 작고 3년 뒤) 김환기 개인전 리플렛에 따르면 본 작품은 엄선된 18점 중 하나로 리스트에 올랐다. 뉴욕 포인덱스터 갤러리에서도 이 작품을 주목했던 셈이다. 크기에선 당시 전시된 비슷한 시기 김환기 아카이브 중 4번째로 큰 작품이었다.
이 큐레이터에 따르면 ‘아침의 메아리’는 푸른색 바탕이 아침 하늘을 닮아 지어진 별명이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특징은 물감을 겹겹이 쌓아 질감을 표현했던 기법에서 얇게 펴바르는 방식으로 바뀐 점이다. 이에 더해 다루는 소재에서도 구체적인 형상이 점점 사라졌던 시기다. 특히 ‘새끼점’이 촘촘하게 찍혀 선을 이루는 부분은 김환기 말년작 특징인 전면 점화로 가기 직전의 과도기를 보여준다.
한편 이번 기획 전시에서 선보인 김환기 ‘아침의 메아리’ 작품이 서울미술관 소장품이 되면서 앞으로 자주 만나볼 수 있을 전망이다. 이 큐레이터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청각과 시각 요소들이 공감각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으로 미술관에서도 애정을 갖고 있다”라며 “앞으로 있을 다른 전시에서도 기획의도가 맞는 부분이 있다면 충분히 나올 가능성이 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