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만 큰 주주행동, 헤지펀드 도우미?···국내선 경영권 분쟁에 악용

대주주 의결권 제한 경영권 분쟁에 되레 악용 금호석화 쿠데타, 한국앤컴퍼니 형제 내전 등 감사위원 분리 선출 사례도 이한상 케이스 뿐

2022-02-19     이상헌 기자
지난해 삼성전자 제53기 정기 주주총회 모습. /연합뉴스

3월 정기 주주총회를 앞두고 동학개미들이 외쳐온 주주행동이 주주가치 제고와는 거리가 먼 기업내 경영권 분쟁에 악용되는 가운데, 국내외 연기금 등 큰손들은 자금력을 앞세워 경영 간섭을 본격화하는 양상이다.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 이슈가 부상하고 HDC현대산업개발에서 중대재해사고가 발발하면서 어느 때보다 주주행동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지만, 일반 주주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기업 지배권을 행사하기엔 현실의 벽은 여전히 높은 실정이다.

20일 한국상장회사협의회 등에 따르면 오는 3월 주주총회에서 기업지배구조 관련 주주제안이 진행되는 곳은 △지난해 한진칼 조원태 회장에게 완패한 KCGI △조카의 난 이후 경영 복귀를 노리는 금호석유화학 박철완 전 상무 △노조추천 이사를 추진중인 KB금융노조 등으로 요약된다.

주주행동은 주주제안, 반대의결권 행사 등 다양하게 이뤄진다. 지난해부터 시행된 감사위원 분리 선출과 다중대표소송을 활용하는 것도 또 다른 방법이다. 자본금 1000억원 이상 상장사를 기준으로 대표소송제기는 0.01%, 이사·감사의 해임 청구는 0.25%, 주주제안은 0.5%의 지분율이 요건이다.

지난해 경영권 승계에서 밀려난 뒤 주주제안으로 기업 분쟁을 촉발시킨 조현식 한국앤컴퍼니 부회장(왼쪽)과 박철완 금호석유화학 상무. /각 사

3월 주총 주주제안 모두 지난해 되풀이
의결권 자문사 난립···통과 여부 불투명

주주제안은 이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인 주주행동 방식으로 분류된다. 일반 주주들이 주총 6주 전까지 요구사항을 이사회에 제출하면 안건을 표결에 붙일 수 있다. 하지만 현 시점 주주제안서가 제출되더라도 4월 이후에 주총을 개최하는 기업에서나 가능한 일이 됐다.

반대의결권 행사도 주주들이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좋은 방법이다. 참여연대가 광주 화정 아이파크 참사 책임이 있는 HDC현대산업개발 사외이사진 연임 반대를 위해 참가주주를 모집중인 것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개인 투자사(엠엔큐투자파트너스)를 통해 보유주식 비율을 40.62%까지 끌어올린 정몽규 회장의 지배권을 넘긴 어렵다.

또 기관투자자들은 의결권 자문기관의 권유에 따라 반대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 대신지배구조연구소, 좋은기업지배연구소, 서스틴베스트 등 민간업체가 난립하는 가운데 국민연금 스튜어드십코드 자문을 맡은 연구단체인 한국기업지배구조원(KCGS)도 영향력이 큰 기관이지만 금융위원회의 지배를 받는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화려한 외형에도 주주행동은 번번이 패배를 맛봤다. KB금융노조는 벌써 4차례 이사회 진입에 실패했고, KCGI의 이번 주주제안도 내용을 보면 2년전에 실패한 시도의 재탕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있다. 결국 지금까지 주주제안과 감사위원 분리 선출 및 최대주주 의결권 제한을 통해 사외이사가 된 케이스는 한국앤컴퍼니의 이한상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뿐이다.

더 나아가 국내 주주행동은 재벌 2·3세의 경영권 분쟁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박철완 전 상무가 10% 지분을 무기로 작은 아버지 박찬구 회장 경영권 승계에 반기를 든 사건은 쿠데타로 인식됐다. 또 한국앤컴퍼니에서 동생 조현범 회장과의 경영권 대결에서 밀려난 조현식 전 부회장이 주주제안을 통해 이한상 교수를 밀어 넣은 것은 아무런 실익 없는 골육상쟁으로 비춰졌다.

심지어 지난해 8월 사조그룹 임시주총에선 정부가 개정상법을 통해 도입한 감사위원 분리선출 의무화와 최대주주 의결권 3% 제한룰이 무력화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주진우 사조그룹 회장이 사조산업 지인 2명에게 자신의 지분 3%씩 대여하는 쪼개기 수법으로 우호 지분을 확보한 것. 이 결과 '분리선출 감사위원 1인 선임의 건'을 통해 주 회장 추천 인사인 안영식 전 대성회계법인 대표이사가 선출됐다.

미국 현지 블랙록 본사 입구 전경. /블랙록

블랙록 이어 네덜란드 연기금도 등장
소액주주운동과 다른 쩐의 전쟁 양상

이런 가운데 헤지펀드 등은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워 기업경영 간섭을 노골화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유럽 최대 연기금인 네덜란드 연금자산운용(APG)은 삼성전자, 현대제철, SK그룹, SK하이닉스, LG화학, LG디스플레이, 롯데케미칼, 포스코케미칼, LG유플러스, SK텔레콤 등 10곳에 주주서한을 보내 실질적인 탄소 배출량의 감축을 요구했다. 이는 경고성 서한이지만 ESG 경영을 무기로 반대 의결권을 행사해 안건을 부결시키겠다는 포석을 둔 것이다.

국제 환경 규제에 편승한 헤지펀드의 경영간섭도 빼놓을 수 없다. 미국 자산운용사 블랙록이 지난 2020년 5월 인도 LG폴리머스 공장에서 발암물질로 알려진 스타이렌이 누출되는 사고가 발생하자 LG화학에 △사고 원인 △경영진의 대응현황 △재발방지 대책 등을 요구한 것이 대표 사례다. 강희주 증권법학회 회장은 "소액주주운동으로 시작한 주주행동주의자들의 요즘 모습을 보면 헤지펀드 도우미가 아니냐는 의심을 갖게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