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컬렉션은 '호랑이 명품관'

18점 중 11점 이건희 기증···임인년 흑호까지 새해엔 호랑이와? 전통 풍속 다채롭게 담겼다

2022-02-02     이호준 인턴기자
임인년 맞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선 ‘호랑이 그림Ⅰ’ 전시가 한창인 가운데, 이건희 컬렉션 호랑이 작품에 관람객 눈길이 모인다./ 이호준 기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임인년 맞이 ‘호랑이 그림Ⅰ’ 전시가 한창인 가운데, 이건희 컬렉션 호랑이 작품에 관람객 눈길이 모인다.

임인년을 맞아 국립중앙박물관 2층 서화실은 호랑이 그림으로 가득 메워졌다. 호랑이 그림만 모은 보기 드문 전시회다. 호랑이 민화전은 1984년 9월 29일 KBS가 88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를 주제로 기획한 전시가 마지막으로 확인된다. △호작도(까치와 호랑이) △산신과 호랑이 등 다양한 주제의 호랑이 작품 18점 가운데 지난해 4월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이 과반을 넘는 11점이다.

이건희 컬렉션 주 수집 작품은 조선 후기 호랑이 민화 명품선이다. 이건희 컬렉션 속 익살스런 모습의 호랑이 민화./ 이호준 기자

주된 수집 작품은 조선 후기 호랑이 민화 명품선이다. 세시풍속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면면이 보인다. 관람객들은 세간에 공개된 바 없는 작품들이라 더 특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전시장에서 만난 한 70대 남성 관람객은 여성경제신문에 “임인년이 검은 호랑이의 해기 때문에 의미있는 작품은 흑호가 등장하는 그림이라 생각한다”며 “전시 기획자도 이런 부분을 의도하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반면, 다른 일부 관람객 사이에선 흑호가 등장하는 그림이 무섭게 느껴진다는 평도 들려왔다. 친근한 얼굴을 한 일반적인 호랑이 그림과는 다른 사나운 풍모에서다.

호작도, 새해 그림 선물 풍속 관련
흑호 호작도···"민화 과도기 보여줘"

일반적인 호작도와 달리 그림 속 검은 호랑이는 경직된 몸통을 돌려 사납게 노려보는 모습이다./ 이호준 기자

의견이 분분한 이 흑호 호작도(까치와 호랑이 그림)의 그림 속 검은 호랑이는 경직된 몸통을 돌려 어딘가 사납게 노려보는 모양새다. 조선 후기 호랑이 민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친근한 얼굴은 찾아볼 수 없다. 이런 모습의 흑호 그림은 희귀한 작품으로 민예품 수집에 몰두했던 에밀레 박물관 설립자 대갈 조자용 선생으로부터 호암 이병철이 입수했다 전한다.

전문가는 이 그림의 이색 지점을 들어 명품으로 칭했다. 호랑이 민화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세영 갤러리조선민화 관장은 여성경제신문과 인터뷰에서 “한국적인 호랑이 모습을 갖추기 이전 모습을 보여주기에 더욱 명작”이라고 말했다. 쉽게 설명하면, 가장 한국적이라 평가받는 우습고 익살스런 호랑이 그림이 나오기 앞서 과도기에는 흑호와 같은 사나운 호랑이도 그려졌다는 것이다.

이어서 호작도에 따르는 세시풍속도 거론됐다.

이른바 ‘세화의 전통.’ 새해를 축복하며 가까운 사람끼리 주고받는 그림을 말한다. △호랑이 △까치 △호랑이가 한데 모여 ‘새해 기쁨을 알린다’는 의미의 ‘호작도’ 그림은 당대 조선에서 유행했다. 흑호가 그려진 ‘호작도’도 그 일부로 추정된다.

전란기 중국 명나라 세화 전통인 ‘유호도(표범과 까치)’ 그림이 조선에 흘러들어와 호작도가 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민속 자료에 의하면 조선에서 호랑이는 액을 막는 의미로 사용됐는데 당초 의미 그대로 사용되다 보니 무섭고 사납게 그려진 게 초기 형태”라고 말했다. 아울러 “조선에선 점점 호랑이가 우스꽝스럽게 그려졌는데 전형적인 한국적 미의 획득”이라며 “세화의 풍습에서 시작된 전통에서 관료를 풍자하는 해학적 의미가 추가된 게 우리에게 익숙한 호랑이 민화”라고 덧붙였다.

문짝에 붙는 호랑이, 용과 한 쌍
"신라 처용 풍속, 문배도 뿌리"

해맞이 그림인 ‘세화’ 풍습과 비슷한 의미로 그려졌던 호랑이 그림 중 ‘용호도’도 있다./ 이호준 기자

해맞이 그림인 ‘세화’ 풍습과 비슷한 의미로 그려졌던 호랑이 그림 중 ‘용호도’도 있다. 이건희 컬렉션에서도 확인되는 종류다. 호랑이 그림 한 점과 용 그림 한 점, 총 두 폭이 나란히 좌우로 전시됐다. ‘용은 복을 부르고 호랑이는 사악한 기운을 물리친다’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전문가는 정월 대문짝에 액을 떨치는 벽사(辟邪)의 의미로 붙이는 ‘문배도’의 일종으로 봤다. 두 점이 나란한데 같은 작품으로 전시됐다는 이유에서다. 이 관장은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시대 처용 그림을 붙이던 행태를 문배도의 뿌리로 본다”고 설명했다. 이어서 “주로 호랑이와 용은 용호상박이라는 말처럼 함께 한 쌍인 문배도가 주를 이룬다”며 “관람객들이 이런 것을 함께 알고 보면 더 재미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호환 많던 조선 역사···아픔의 호랑이도
조선인이 바랐던 호랑이? "관람 포인트"

지역 사회 굿판에서 내걸던 산신도에도 호랑이가 등장하는데, 호환과 관련돼 의미가 다르다./ 이호준 기자

이건희 컬렉션 호랑이는 새해를 맞는 기쁜 의미의 호랑이 외에도 민족의 아픔과 관련된 호랑이도 있기에 주목된다. 주로 지역 사회 굿판에서 내걸던 산신도가 그 예다.

조선시대 속 호랑이는 앞서 액을 막는 영험한 일면이 존재한 반면, 실제 두려운 호환의 짐승이었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선 조선 내 들끓었던 호환이 확인된다. 관련 기록만 1501건이다. 사람이 죽거나 호랑이가 죽거나, 죽고 죽임의 연속이었다.

지역에선 호환에 따른 굿판이 벌어지곤 했는데 이때 호랑이 산신도가 신당 중앙에 걸리곤 했다. △파주 호영산 호대감 놀이 △은산별신굿 △포항 강사리 범굿 등이 대표적이다. 은산별신제의 절차에 대한 중요무형문화재 문건에 따르면, ‘호랑이는 산신의 충실한 심부름꾼으로 순종적인 자태가 강조돼야 한다’고 설명한다.

실제 그림 속 호랑이는 다소곳이 산신의 오른편(그림의 왼쪽)에 자리한다. 산중호걸의 호방한 모습보다는 얌전한 반려동물처럼 앉았다. 앞서 70대 관람객은 이 그림에 “눈빛이 선하게 표현돼 재밌다”며 “아마 호환을 두려워한 조선인이 바라던 호랑이 모습은 아닐까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편, 임인년 음력 설과 호랑이 전시가 겹치면서 민화에도 대중적 관심이 드러나고 있다. 민화 업계는 ‘새로운 전시를 통해 시대가 민화의 가치를 발견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이 관장은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대중은 김홍도보다 창의적인 그림 ‘민화’를 선택할 것”이라며 “과거 호암(미술관)에서 열린 민화전이 현대 민화의 관심을 촉발했듯 이번 이건희 컬렉션도 그에 상응하는 효과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 용어 해설: 벽사(辟邪)

요사스러운 귀신을 물리친다는 의미로 호랑이가 주된 소재로 활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