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재의 국제금융 인사이트] 노태우와 바이든의 리스크매니지먼트 전략

성공적 리스크 관리? 전략적·운용적 영역 모두 필요 집값 잡은 노태우 정부·코로나 재유행 시킨 바이든 바이든, 전반적 관리 방향 재설정 필요

2021-10-16     김성재 가드너웹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13대 대통령에 당선된 민정당 노태우 총재가 당시 당 총재실에서 다양한 포즈로 신년맞이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1987년 대한민국은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해 4월 당시 대통령이던 전두환은 개헌논의를 중지시키고 5공 헌법하에 또 한 번의 간선제 체육관 선거로 차기 대통령을 뽑겠다고 선언했다. 4·13 호헌조치를 발표한 것이다. 분노한 학생들은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이윽고 6월 10일 당시 집권 민정당이 전당대회를 열어 여당 대통령 후보로 노태우를 확정 지었다. 그러자 정부 여당에 대한 반발이 전국을 뒤덮었다. 학생들은 기말고사를 거부하고 도심에 집결하여 격렬한 반정부 데모를 벌였다. 온 나라가 하얀 최루탄 가스로 뒤덮였다.

6월 하순이 되자 시위의 물결은 더 이상 경찰력으로는 진압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다. 이때 전두환 대통령은 계엄령 선포와 더불어 시위 진압을 위해 군대의 투입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1980년의 비극이 서울에서 재현될 뻔했다. 국가의 운명이 백척간두의 기로에 서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다. 주요 도시의 심장부에서 화염이 치솟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6월 29일 집권당의 대표인 노태우는 항복 선언을 했다. 이른바 6·29 선언을 통하여 국민의 오랜 염원이었던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겠다고 발표했다. 

그해 겨울 치러진 대선에서 야당의 두 지도자가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노태우는 근소한 차이로 차기 대통령에 당선됐다. 합리적인 경제학자 위주로 내각을 구성하고 88 서울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국가 비전을 선보였다. 기쁨도 잠시, 두 가지의 난제가 그를 가로막았다.

우선 대통령이 되자마자 치러진 총선에서 집권당이 패배했다. 여소야대가 되면서 국정 수행의 동력이 약화됐다. 또, 1987년부터 꿈틀대던 집값이 크게 급등했다. 1988년 전국의 평균 주택매매 가격은 13.2% 상승했다. 1989년에도 상승세가 이어져 14.6%까지 올랐다.

한편, 1986년도에 11.3% 성장했던 한국 경제는 1987년과 1988년에도 12%대의 높은 실질 GDP 성장률을 보이고 있었다. 덩달아 물가도 상승하면서 서민 생활의 안정을 위협했다. 노조의 신규 조직이 붐을 이루었고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파업이 전국에 걸쳐 연일 벌어졌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노태우 정부는 획기적인 주택공급 방안을 마련해 시행했다. 임기 중 당시 전체 주택의 30%에 해당하는 2백만 호의 새집을 건설해 공급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다들 반신반의했지만, 분당·일산 신도시를 포함해 5년간 269만 호를 새로 공급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 1990년에 전년 대비 21%까지 치솟던 집값은 1991년 들어 안정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1992년에는 5% 하락했고, 1993년에도 2.9%가 추가로 하락했다. 이후 집값은 2000년까지 평균 0.8%가 하락하면서 꾸준히 안정세를 보였다. 

1988년 69.4%였던 주택보급률도 꾸준히 상승해 1991년은 74.2%에 이르렀다. 주택 가격의 안정세와 올림픽 특수가 서서히 사라지면서 경제성장률도 다소 떨어졌다. 1991년에 10.8%로 두 자리를 유지하고 1993년에는 6.9%로 하락한데 이어, 9%대를 회복했다. 주택공급의 확대를 통한 물가 안정이 중장기적 성장의 발판이 됐다.

우리나라 주택가격 상승률과 경제성장률./자료 출처: 한국은행 '국민소득' 및  한국부동산원 '전국주택가격동향조사'

이러한 집값 잡기의 성공은 노태우 정부의 치밀한 리스크 매니지먼트 전략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부동산 가격의 불안정이 경제의 불확실성을 높여 성장 잠재력을 저하할 것이라 본 당시 정부 경제관료들의 혜안이 작용한 덕분이었다.

그 외에도 노태우 정부는 안보 위험을 전략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1988년 북방정책을 수립했다. 1990년 소련과 수교하고 1992년에는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그와 같은 결단이 없었다면 그 이후 누렸던 안보적·경제적 이익의 많은 부분을 포기해야 했을 것이다. 당시 마련한 ‘남북기본합의서’는 현재에도 남북관계를 규율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고 있다.

노태우 정부의 위기관리에서 보듯 성공적인 리스크 매니지먼트는 경영의 두 가지 영역을 두루 아울러야 한다. 우선 국가나 조직의 지속가능한 장기적 성장을 저해할 위험 요소를 관리하는 ‘전략적 리스크 매니지먼트’를 치밀하게 수행해야 한다. 또한, 현재 국가나 조직의 원활한 기능을 위협하는 요소를 적절히 통제하는 ‘운용적 리스크 매니지먼트’에도 충실해야 한다.

지금 미국 의회는 바이든 대통령의 국가 전략적 리스크 매니지먼트 계획인 사회복지 인프라스트럭쳐(기반 시설) 플랜의 규모를 둘러싸고 민주당 내 중도진영과 진보진영이 극렬하게 대립하고 있다. 조 맨친(Joe Manchin) 상원의원을 필두로 한 중도진영은 당초 3.5조 달러에 이르던 복지 예산 규모를 절반 이하로 줄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진보진영은 만약 복지예산이 대폭 줄어들 경우 이미 여야가 합의한 도로·교량 등 물적 인프라스트럭쳐 플랜을 거부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양 진영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도 30%대로 하락했다.

그런데 현재 바이든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전략적 포지셔닝의 실패가 아니다. 다수의 미국인은 바이든의 국가 개조 전략에 심정적으로 지지를 보내고 있다. 실제로 그의 정치적 입지를 위태롭게 만드는 것은 운용적 리스크 매니지먼트에서 범한 숱한 실수들이다.

미국 워싱턴DC 연방의회 의사당에서 케빈 매카시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가운데)가 공화당 의원들과 함께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철군 및 대피 작전과 관련해 발언하고 있다. 매카시 원내대표는 조 바이든 대통령이 그가 모든 위기 대응에 실패했다고 각을 세웠다./연합뉴스

그리고 미숙한 운용적 리스크 매니지먼트는 대개 자신의 경험에 대한 확신으로 전문가의 의견을 무시할 때 발생한다. 바이든은 이미 조급한 미군 철수에 반대하는 군 수뇌부의 의견을 무시하고 아프가니스탄 철군을 강행했다 많은 생명을 위태롭게 했다.

코로나 백신의 효과를 과신하여 공식 석상에서 앞장서 마스크를 벗어 젖혔다가 델타 변이가 급속히 퍼지게 하는 실수를 범했다. 그리고는 마스크를 다시 쓰기는 커녕 민간 기업에 백신 접종을 강제했다가 가뜩이나 어려운 구인난을 가속화하고 말았다.

글로벌 공급망이 붕괴되어 생필품이 모자라고 물가가 급등하는 와중에 이에 대한 진지한 정책적 대응은 찾아볼 수 없다. 연일 기름값이 급등하고 식료품 가격도 크게 올라 민생이 위협받고 있지만, 서민의 대통령이란 그가 여기에 대하여 크게 신경 쓰는 기색은 보기 어렵다.

민주당의 중도파가 염려하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공급망 붕괴 문제가 해결도 되기 전에 엄청난 규모의 재정지출이 이루어진다면 물가는 한 단계 더 점프할 것이다. 그러면 임금 인상이 물가 상승을 쫓아가지 못하면서 중산층과 서민의 불만은 크게 고조될 것이다.

선거에서 심판받는 것은 민주당이 항상 이기는 뉴욕과 캘리포니아 같은 블루 스테이트 출신의 진보진영이 아니다. 스윙 스테이트 출신인 중도진영이 심판의 주요 타깃이 된다. 만약 민주당 중도진영이 하원 의원 전원을 다시 뽑는 내년 중간선거에서 공멸하면 바이든의 개혁 구상도 물거품이 될 것이다.

바이든은 전략적 리스크 매니지먼트에 몰두하다 운용적 리스크 매니지먼트를 놓쳤는데, 그 결과 운용적 리스크 매티지먼트 뿐만 아니라 전략적 리스크 매니지먼트까지 실패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바이든이 국정의 전반적인 방향을 재점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성재 가드너웹대학교 경영학교수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종합금융회사에서 외환딜러 국제투자업무를 7년간 담당했고 예금보험공사에서 6년간 근무했다. 미국에서 유학하여 코넬대에서 응용경제학석사, 루이지애나주립대에서 경영학박사 (파이낸스)를 취득했다. 2012년부터 노스캐롤라이나주 가드너웹대학교에서 재무·금융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