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우먼] “앞뒤 재면 도전할 수 없어요”
‘7년차 기자’ 장윤미에서 ‘변호사’ 장윤미로 “여성 기자 한계? 그들이 하는 얘기일 뿐” “법적 절차상 피해자 보며 여성 이슈 관심”
[the 우먼]은 다양한 분야에서 '나만의 길'을 걷고 있는 여성을 만난다. 역경 속에서도 가슴 속 깊이 간직한 꿈을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듣는다. [편집자주]
사람은 변환점을 마주하는 순간이 있다. 장윤미 변호사(41)는 “어떤 조직에 있든, 누구에게나 이 일을 계속한다면 어떤 방향으로 경력을 쌓아 나갈지를 고민하는 시점이 옵니다”라고 말했다. ‘7년차 기자’ 장윤미가 그랬다.
활발하고, 취재원들로부터 ‘술도 잘 마신다’고 평가받던 기자 장윤미는 그 순간 로스쿨 진학이라는 도전을 선택하고 ‘변호사 장윤미’라는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장 변호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건 로스쿨뿐만 아니라 모든 선택이 마찬가지라서, 용기를 갖고 선택했어요”라고 밝혔다.
팩트경제신문이 지난달 10일 서울 서초구 소재 사무실에서 장 변호사를 만나 그가 밟아온 삶의 변곡점을 들었다.
10년 만에 뽑힌 여성 기자···배경은 ‘근자감’
장 변호사는 고등학교 시절 전교회장을 맡을 정도로 활달한 인물이었다. ‘학교 생활을 재미있게 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공약을 내걸 정도로 교우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에 충실한 학생이었다. 처음부터 기자를 꿈꾼 건 아니었다. “10대 때는 볼 수 있는 직군이 굉장히 제한적이잖아요. 그래서 (그때는) 선생님을 하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대학교에 진학한 뒤 진로를 고민할 때는 기자 외 다른 직종이 보이지 않았어요. 그 당시에는 제가 잘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직업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일반 회사는 아예 지원서도 안 넣었어요.”
여기에는 대학 시절 경험한 동아리 활동이 큰 영향을 미쳤다. 서울대 철학과에 진학한 장 변호사는 ‘공부방’이라는 동아리에 입부했다. 그곳에서 학습 지원을 받기 어려운 상황에 놓인 학생들에게 방과 후 학습을 진행하고,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사회 문제에 관심을 지니게 됐다고 한다.
쉽지는 않았다. “저는 항상 시행착오의 연속이었어요. 기자가 되고 싶었지만 (취업 과정에서) 많이 떨어졌고, 처음에는 잘 안 됐어요.” 장 변호사는 졸업 1년 전부터 기자로 취업하기 위해 몰두해 왔다. 하지만 잘 풀리지 않아 졸업 후에도 6~7개월가량 기자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그때 저는 ‘그래도 내가 기자가 될 수 있겠지’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랄까,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너무 앞뒤를 재거나 하면 도전할 수가 없잖아요. ‘한번 해보지, 뭐. 그래도 나는 당연히 되지 않을까’라는 믿음을 가졌죠.” 이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그는 CBS 보도국에서 ‘10년 만에 뽑힌’ 여성 기자가 됐다.
당시 조직문화는 현재와 비교한다면 남성중심적 분위기가 더욱 우세했다. 여성 기자를 뽑으면 이런 분위기 안에서 버티기 어려울 것이라는 인식도 존재했다. 입사하고 보니 여자 선배는 보도국 전체를 통틀어 단 한 명이 전부였다고 한다. 그것도 10년차 위의.
장 변호사는 자신을 표현하는 다섯 글자로 “최선 다해요”라고 말했다. 매사 열심히 하는 성격은 기자 초년생 시절에도 어김없이 발동됐다. 경찰청과 공정거래위원회 등 다양한 부처를 출입하고, 대학 입시 비리를 취재해 단독 기사를 쓰고, 정치부로 이동해 여러 가지 입법 과정을 취재하면서 주위로부터 인정을 얻어갔다. 주위에서 여성 기자의 한계를 말하는 목소리는 ‘그들이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개의치 않고 묵묵히 자신이 맡은 바를 완수했다.
그래도 어려움은 찾아온다. 그때 흔들리던 기자 장윤미를 잡아준 건 단 한 명뿐이던 여자 선배의 말이었다. “기자 생활을 할 때 너무 힘들어서 며칠 동안 회사를 무단결근했어요. 그때 그 여자 선배가 제게 ‘윤미야, 일단 버텨라’라고 얘기해 주시더라고요. 불합리하고 억울한 상황인데도 버티라는 말이 아니었어요. 어떤 조직에 몸담았을 때, 혹은 기회가 주어졌을 때 힘들더라도 끝까지 한번 버텨 보라는 말씀이셨어요. 힘들 때 저를 붙들고 있는 한 마디였습니다.”
첫 번째 터닝포인트는 기자 6~7년차 무렵 눈앞에 놓였다. 이때 기자 경험은 장 변호사에게도 큰 자산이 됐다. “저는 정치부가 재밌다고 생각했거든요. 제게 정당 출입이 맞는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이 분야를 특화해 기자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다른 방향을 모색해 볼 것인지 고민하던 시점에 로스쿨 제도가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기자 이력을 기반으로 로스쿨에 가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결단하게 됐습니다. 사회를 보는 눈과 상식이랄까요, 기자로서 쌓은 경험치를 사건 수행하는 데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기자 생활을 통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고, 부처나 국회 등 여러 곳을 경험하게 되면서 사회를 보는 눈과 상식을 기르게 돼 변호사라는 새로운 직업을 택할 수 있는 토양이 됐다는 설명이다.
괴물부터 윤중천 사건까지···큰 사건 맡아와
장 변호사는 현재 여성변호사회 공보이사로 활동하며 여성 문제 관련 분야에 목소리를 내오고 있다. 그는 “기자로서 사회부에 있을 때는 꼭 여성 이슈를 더 (집중해) 다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요, 법적 절차 안에서 피해를 본 이들을 가까이에서 보다 보니 아무래도 (여성 이슈에)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라고 이유를 언급했다.
특히 최영미 시인이 쓴 ‘괴물’이라는 시를 두고 고은 시인과 법적 다툼을 벌일 당시 최 시인의 법적 대리인을 맡아 승소를 견인했다. ‘괴물’은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미투 운동(#me too·나도 말한다)의 촉발제 역할을 한 시다. 당시 재판 결과를 두고 많은 이목이 쏠렸다.
“재판 과정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과거에 벌어진 사건이다 보니) 너무나 많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증거를 수집하고, 반격하고, 방어해야 했어요. 하지만 개인이 아니라 미투 운동 연장선상에서 상당한 상징성을 가진 사건이기 때문에 변호인단도 엄중함을 인식하면서 사건을 수행했습니다. 정말 수십 년 전 일기까지 다시 되짚어보면서 그 당시 사건을 재구성하고, 재판부를 설득하는 등 최선을 다하는 과정이 있어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생각합니다”고 반추했다.
차분히 말하던 장 변호사의 목소리가 다소 커지는 순간이 있었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이 연루된 일명 ‘윤중천 사건’ 피해자를 변호한 사건을 설명할 때다.
장 변호사는 “검찰이 별건 기소를 하면서 사실상 적법 절차를 어겼고, (이 과정에서) 상당한 고충을 겪은 피해자를 돕고 재판 결론이 무죄로 나와 보람을 느꼈어요”라고 강조했다.
장 변호사에 따르면 검찰은 피해자 측이 제출한 휴대전화에서 사건과 관련 없는 일부 내용을 추출해 피해자를 공갈 혐의로 기소했다. 이 사건은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기소 배경으로 피해자가 ‘김학의 동영상’을 최초로 알고 있던 인물이어서 검찰 내부에서 일종의 괘씸죄가 작용했다고 추측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장 변호사에게 ‘법적 절차 안에서 피해를 보는 사람을 돕는 일’로 다가왔다. 그렇기에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피해자는 최후 변론 때 울면서 ‘나는 검사가 만든 그 상자 안에서 이리저리 희롱을 당하는 벌레 같은 느낌이었고, 나중에는 나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고 이야기했어요. 검찰의 별건 수사 관행은 법원이 바로잡아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지적했다.
“변호사? 기자?···‘좋은 사람’이 먼저 돼야”
장 변호사는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언급했다. “제가 변호사든, 기자든 아니면 나중에 완전히 다른 영역의 일을 하더라도 ‘좋은 사람’이 선행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갈등을 겪거나 어렵고 힘든 사건을 마주해도 제가 내린 결론은 정직이 최선이라는 거예요. 좋은 사람이 돼야 제가 무슨 일을 하든 그것도 잘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라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