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출! 구석기 법령] 이재용·최태원도 한방에 보내는 '집중투표제' 과연 약일까?

2021-09-24     이상헌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연합뉴스

판사는 그날의 날씨가 아닌 '시대의 기후'를 고려해야 한다. 사법제도는 변화를 주도하지는 못하더라도 시대 흐름을 읽어낼 줄은 알아야 한다는 의미다. -긴즈버그

법은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야 한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려버린' 법은 사회와의 조화를 깨트린다. <팩트경제신문>은 재창간 기획 특집으로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법령의 문제들을 살펴보고 나아가 지지부진한 국회의 입법 개정을 촉구할 계획이다. 이제는, 시대가 법을 바꿀 차례다. [편집자주] 

이재용 체제 500만 주주가 반대한다면?

동학개미가 자본시장 주역으로 떠올랐다. 은행예금과 부동산에 묶여 있던 자금이 증시로 대거 이동하면서 대기 자금만 100조원대를 벌써 넘었다. 소액주주들의 힘이 어느 때보다 커지면서 그간 개별기업의 선택사항이었던 '집중투표제'가 '의무화'된다면 동학개미들이 모든 회사의 이사회를 장악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는 셈이다. 하지만 과연 '의무화'가 옳으냐에 대해선 반대 목소리가 크다.

지난 일년 동학개미가 몰려든 좌표는 한국증시를 이끄는 삼성전자다. 올해 삼성전자 주식을 보유한 소액주주가 500만명을 넘어설 전망이다. 지난 6월 반기보고서 기준 지분율 1% 이하 주주는 전년 대비 240만명 늘어난 454만6497명에 달했다.

개인투자자 삼성전자 전체 지분율은 13%를 넘어섰다. 9.16%를 보유한 국민연금을 일찍이 추월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이 보유한 최대주주 지분(21.16%)과도 한 자릿수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고(故) 이병철, 이건희 선대 회장이 지배해온 삼성전자가 500만 동학개미가 지배하는 삼성전자로 변모한 것이다. 이제 이 부회장도 주주 뜻에 반하는 경영은 꿈도 꿀 수 없는 처지다. 지배권이 누구에게 있느냐에 따라 경영이사회 구성은 달라진다. 소액주주 목소리가 커지면 최대주주 쪽과 이사회 구성을 두고 힘겨루기에 들어가게 된다.

이런 가운데 '집중투표제'란 소액주주 보호장치는 동학개미들을 유혹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 기업 주주총회에서 이사를 선임할 때 특정 이사 후보에게 표를 몰아줄 수 있기 때문에 원하는 인물을 경영이사회에 진입시킬 수 있다.

가령 이사 3명을 뽑으면 1주당 3표를 행사할 수 있는데 3표를 각각의 이사에게 줄 수 있고, 한 명의 이사에게 몰아줄 수도 있다. 한 명에 이사에게 3표를 몰아주면 지분이 적은 소액주주도 얼마든지 자신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이사를 뽑아 기업 경영을 감시할 수 있다.

반면, 단순투표는 표결 결과가 51:49가 되면 51%의 지지를 받는 사람이 모든 결정을 내리는 구조다. 이렇게 되면 최대주주가 원하는 사람만이 이사로 선임되는 경향이 있다. 또 승자독식으로 지배주주 횡포가 발생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선 공정거래법상 내부거래 규제를 비롯한 회사법상 견제 장치가 있긴 하다.

집중투표제는 1998년 상법 개정을 통해 도입된 제도로 현재는 개별 기업의 선택사항이다. 정관에 '집중투표를 도입하지 않는다'고 규정하면 이를 시행하지 않아도 돼 결국 유명무실한 제도로 남았다. 

또 결과적으로 기업 현장에선 완전히 사문화됐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 등에 따르면 집중투표제를 도입한 곳은 5%에 불과하다. SK텔레콤과 한화생명, 포스코와 KT 등에 불과하다. 또 이마저도 표면적으로만 내세우고 있을 뿐 아직 집중투표제를 통해 의결권이 행사된 경우는 없다.

이사회 독립성 명분에도 '역선택 부작용'

반면, 집중투표제 의무화를 주장하는 이들은 이사회 독립성을 명분으로 내세운다. 대표적인 찬성 인사인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재벌 지배구조에 민주적인 운영방식을 도입하는 것"이라고 주장해오고 있다. 지난해 국회를 통과한 '감사위원 분리선출 의무화'와 함께 선거때마다 재벌 개혁 방안으로 보수와 진보 구분 없이 꺼내든 것이 집중투표제 공약이다.

박근혜 대통령에 이어 문재인 대통령 공약에도 집중투표제 의무화가 포함됐다. 현재 각 당 선두 주자도 입장이 갈린다. 이재명 경기지사는 지난해 공경경제 3법 내 집중투표 의무화가 포함되지 않은 점을 비판하고 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주주행동주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면서도 기업 경영에 발목을 잡을 수 있는 규제에 대해선 조심스러운 모습이다.

다만, 기업 현장이 가장 우려하는 집중투표제 부작용은 역선택이다. 쉬운 예로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 경선에 집중투표제를 적용한다면 선두를 달리는 윤석열 후보를 반대하는 유권자가 최재형·홍준표·유승민 등 2위권 후보 중 한 사람에게 4표를 몰아줄 수 있단 얘기다. 선두가 탈락하며 지지율이 왜곡될 수 있단 의미다.

특히 한국은 이사회 독립성을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민간회사 사외이사 연임을 시행령으로 제한하는 유일한 국가다. 그렇다보니 전문적 경영능력이 검증된 사람이 이사회에서 멀어지고 기업 이사직을 나눠 먹는 자리쯤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크다.

글로벌 스탠다드, 자율적 선택의 대상

글로벌 스탠다드를 보면, 집중투표제는 자율적 선택 대상이다. 그룹 총수든 사모펀드든 지배주주가 경영권을 독점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란 얘기다. 최근 ESG (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강조하고 있는 행동주의 펀드 블랙록도 이사회 우수성과 효율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집중투표제 폐지가 국제적 추세가 됐다. 미국은 1940년대부터 집중투표제를 본격 도입했지만 현재는 대다수 주가 의무규정을 폐지했다. 현재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한 주는 애리조나와 네브래스카, 사우스다코타 3곳뿐이다. 노스다코타·웨스트버지니아·캘리포니아·하와이는 부분적 의무화다.

집중투표제 의무화의 또 다른 문제는 소액주주를 대표하는 사람이 이사로 임명될 경우 이사회 구성원간 이해관계가 엇갈리게 된다는 점이다. 이사회가 내린 결정이 일관성을 잃게 되고 모순된 의사결정으로 회사 자산 낭비가 일어날 수 있다. 이는 결국 주주 전체 손해로 이어진다.

아울러 회사 영업비밀과 같은 중요 정보가 유출될 가능성이 있다. 지배주주의 사익추구를 막기 어려운 것처럼 소액주주를 포함한 다른 주주의 사익추구 또한 막기 어렵기 때문이다. 비밀을 유지해야 하는 사업의 채산성은 떨어질 것이고, 결과적으로 주주 전체 수익률이 떨어질 수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 26일 경기도 이천 SKMS연구소에서 열린 '이천포럼 2021' 퀴즈 이벤트에서 구성원과 퀴즈를 풀고 있다. /SK그룹

지금도 최태원 등 모든 재벌총수 사정권

재계도 이사회 전문성 보장과 경영권 보호에 대한 우려가 해소되지 않는 한 집중투표제 채택은 어렵다고 말한다. '경영권'은 사전적으로 누구에게도 간섭을 받지 않고 합법적인 선에서 재량권을 행사할 때 의미가 있다는 주장이다. 또 '경영'을 함께 한다는 것은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한 팀이 되는 것이다. 반면 시장참여자는 언제든지 불평할 수 있고 기업이 싫으면 떠나면 그만이기 때문에 책임감이 떨어진다. 

한국경제연구원은 감사위원 분리선출과 집중투표제가 함께 시행되면 국내 기업중 네이버와 셀트리온, KB금융지주, SK텔레콤, SK이노베이션, KT&G, 삼성SDI 등의 이사진 절반이 외국투기자본에 의해 선임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집중투표를 악용해 적대적 투기자본이 회사 유니폼을 입고 참모 회의(이사회)에 참석할 수 있게 된다는 얘기다.

지난 3월 정기주주총회을 보면, 소액주주 이사회 진입 열망이 자칫 기업 내부 경영권 분쟁에 악용되기도 한다. 금호석유화학 경영이사회 진입을 시도한 박철완 상무의 경우 주주행동주의를 앞세운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삼촌인 박찬구 회장에 완패했다.

또 비슷한 시기 한국앤컴퍼니도 내전이 전개됐다. 경영권 승계에서 밀려난 조현식 부회장이 주주제안을 명분으로 이한상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를 감사위원으로 제안하면서 '감사위원' 선출전에서 승리를 거둔 것.

이밖에도 사조산업 이사회가 캐슬렉스CC 서울과 캐슬렉스CC 제주의 합병안을 철회하기로 한 배경에도 지배주주와 소액주주간 경영 갈등이 있었다. 주진우 회장과 특수관계자 지분율이 56.17%에 달하지만 주 회장 역시 지분이 3%로 제한되면서 감사위원 선출시 소액주주 반발이 우려됐기 때문이었다.

또 일각에선 재벌총수보다 투자자본이 기업을 경영하는 것이 차라지 낫지 않느냐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외국투기자본이나 국민연금이 추천한 낙하산 인사들에 대한 검증 전혀 이뤄지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특히 집중투표제는 모든 재벌 일가 경영권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는 점에서 위협으로 다가온다. 최태원 SK 그룹 회장과 재산분할 청구 소송중인 노소영 아트센터나비 관장은 부부가 결혼한 이후 함께 일군 공동 재산으로 최 회장의 SK 지분 42.3%를 요청했다.

노 관장 요구대로 지분 재산분할이 이뤄지면 노 관장은 SK 지분의 7.8%를 보유하면서 최 회장에 이어 SK 2대 주주에 오른다. 여기서 '집중투표제'를 적용하면 노 관장의 주주제안을 통해 최 회장 경영권을 무력화할 수 있다.

결국 집중투표제는 긍정적인 효과와 부정적인 효과를 동시에 가지고 있어 선택여부를 기업 자율에 맡기는 것이 좋다는 것이 중론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자율에 맡겨둘 경우 어떤 경영자도 집중투표제를 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반론이 있지만 만약 집중투표제가 회사의 경쟁력을 높이는데 도움이 되는 수단이라면 그것을 택하는 기업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