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병명개정] "배회(徘徊) 용어도 못 쓴다" 노인 인권 천국 일본

'목적 없이 어떤 곳을 어슬렁거린다'는 의미 치매 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 조성 우려 시민이 직접 단체 만들어 목소리 높여 개선

2021-08-20     김현우 기자
일본의 치매 환자 실종 예방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단체 '일본 치매 워킹 그룹'. 관계자가 일본의 치매 환자에게 실종 예방에 대해 교육하고 있는 모습./ 디자이닝 포 디멘시아

일본은 어리석다는 부정적인 뜻을 가진 치매 병명을 인지증으로 바꾼것도 모자라, 일부 도시에서는 치매 노인들에게 배회라는 용어도 사용할 수 없도록 했다. 배회는 치매 환자에게서 흔히 보이는 증상이다. 하지만 이 용어가 치매 환자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배회의 사전적 의미는 '목적없이 어떤 곳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나니는 것'이다. 일본 내 지방자치단체는 이 말이 치매 환자에 대한 편견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일본 내에선 지난 2014년, 후쿠오카 현, 오무타 시가 가장 먼저 배회 용어에 대한 사용 금지 조치를 내렸다. 지역 내 치매 케어 슬로건 또한 '안심하고 외출 가능한 거리'로 정했다. 배회를 외출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같은 해 효고 현, 구니타치 시, 아이치 현 등의 지자체도 실종 치매 노인 찾기 캠페인 등을 진행할 때, 배회 대신 '외출 중 행방불명', '혼자 걷는 중 길을 헤매다'등의 대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주한일본대사관 관계자는 "일본에선 치매 환자에 대한 인식이 굉장히 디테일하게 잡혀있다"며 "일본 내 사회적으로 자리잡은 치매 관련 용어들도 순화시키는 작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고 답했다. 특히 그는 "(치매 관련 단어 순화 작업을) 정부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이 단체를 만들어 목소리를 높이고, 정부는 단체를 따라가고 있는 형태"라고 강조했다.

후쿠오카 현 오사카 역에 설치된 '치매 실종 노인 모의 훈련' 안내 표지만. 일본 치매 노인 지원 단체인 '일본 치매 워킹 그룹'은 시에 거주하는 치매 환자 실종 방지를 위해, 실종 노인 모의 훈련을 매달 진행한다./ 일본 블로그 캡처

이처럼 배회 용어 사용 금지 조치는 일본의 치매 실종 예방 단체와 그들을 지지하는 시민들의 적극적인 노력에서부터 시작됐다. 작은 목소리가 모여, 큰 힘을 발휘한 것이다. 일본의 치매 실종 노인 예방 단체인 '일본 치매 워킹 그룹'은 지난 2014년부터 '배회' 용어 사용 금지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쳐왔다. 일본 매체 아사이 신문 디지털에 따르면, 해당 단체는 "배회 용어는 치매 환자의 존엄성을 해친다"며 "배회 용어 사용을 금지하고 '외출'이란 단어를 적극 추천한다"고 각 지자체 단체를 통해 목소리를 냈다.

단체와 시민들의 노력에 국내 보건복지부 격인 일본 후생 노동성은 "배회 용어 사용 제한에 명확히 동의한 것은 아니다"면서도 "치매 환자를 직접 대하는 의사에게 '배회'용어를 사용하지 않도록 권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의 치매 병명 개정도 국민 공모를 통해 이뤄졌다. 주한일본대사관 관계자는 "일본 내에서 치매 병명이 인지증으로 개정된 이후에도, 사회적 용어 정착을 위해 시민 단체가 발 벗고 나섰다"고 설명했다.

일본 경찰청에 따르면, 각 치매관련 단체들은 치매 노인을 돕기 위해 '치매 지식 기본 연수 프로그램'등 일반 시민을 상대로 관련 교육도 활발이 이뤄지고 있다. '인지증 서포터즈'라는 치매 지원 단체는 지난해 기준, 가입자가 2000만명을 넘어서기도 했다. 또한 치매 환자가 카페 서빙, 세차, 원예 등 단순한 노동을 통해 사회 구성원으로 일할 수 있도록 지자체에선 다양한 일거리 프로젝트도 만들고 있다. 

오무타 시의 치매 환자 실종 예방 모의 훈련 모습./ 일본 블로그 캡처

국내에서도 치매 용어 변경 등을 통해, 치매 환자에 대한 처우 개선 노력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특히 문재인 정부가 '치매국가책임제'를 들고 나오면서부터 치매 관련 정책은 다양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일본도 쉽게 바꾼 치매 병명 개정은 10년여간 제자리 걸음이다. 

부정적인 뜻이 담겨 있는 사실을 알고도 행정적 문제와 비용 문제를 연관지으며 미뤄지고 있는 것이다. 학계 관계자는 "이미 정착되어 있는 치매 용어를 굳이 바꿔야 하냐"며 "행정적인 측면에서도 굉장한 무리일 뿐더러, 개정한다 하더라도 개정된 병명이 사회에 정착하기까진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 

국회에서도 치매관리법 개정을 통해 병명을 바꾸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모두 계류된 상태다. 심지어 가장 최근 김두관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5번째 치매 개정안 조차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치매라는 병명의 익숙함에 정작 치매 환자 본인들은 치매의 한자 뜻대로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뜻 뿐만 아니라, 일본의 정신의학자 쿠레 슈우조가 지은 '치매' 병명은 일제 잔재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관계자는 "병명을 만든 일본마저 바꾼 치매 이름을 개정하기 위해선, 정부가 아니라 국민이 먼저 나서서 목소리를 내고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팩트경제신문>은 치매 병명 개정 공모전을 진행 중이다. 내달 13일까지 이어지며, 치매 대체 용어를 정해 응모하면된다. 심사를 통해 1등 당첨자에게는 200만원의 상금이 주어진다. 또한 공모전에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의원들이 참여해 직접 심사할 예정이다. 공모전이 끝나면, 응모된 명칭을 취합 후, 실제 개정안에 반영할지도 보건복지위 차원에서 이뤄질 예정이다.

팩트경제신문에서 진행하는 '치매 병명 개정 공모전' 포스터./ 팩트경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