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춘의 바둑이야기]‘반상(盤上)의 월화드라마’ 지지옥션배 이야기
15년째 맞는 신사 대 숙녀 대항전, 성 대결로 인기···14회전 숙녀팀 8승6패 캐나다서 일시 귀국 김윤영 4단 개막전·이튿날 김수장·유창혁 연파해 화제
‘반상(盤上)의 월화드라마’로 불리는 기전(棋戰)이 있다.
올해로 15년째를 맞은 지지옥션배 신사 대 숙녀 연승대항전이다. 법원경매 전문기업 지지옥션이 후원하는 이 대회는 대회 명칭에서 알 수 있듯 남녀가 편을 갈라 맞붙는 반상 성(性) 대결이다.
2007년 바둑TV에서 처음 대박을 터뜨린 기획이다. 당시만 해도 여자 기사들의 수준이 남자에 미치지 못했는데 여자 기사들과 전성기가 지난 남자 기사들이 팀을 이뤄 대결하면 재밌겠다는 발상 아래 성사됐다.
12 vs 12의 연승대항전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 대국을 펼치는데 14번 대결을 치른 결과는 숙녀 팀이 8승 6패로 앞서고 있다.
신사팀은 2∼3, 5, 7, 10, 13기, 숙녀팀은 1, 4, 6, 8∼9, 11∼12, 14기 대회에서 우승했다.
대회 초기에는 조훈현, 서봉수, 유창혁 9단이 버티고 있는 신사 팀이 앞서갔는데 신사 팀이 나이를 먹고 숙녀 팀에 최정, 오유진, 김채영 등이 등장하면서 최근엔 팽팽하거나 숙녀 팀이 앞서는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몇 년 전부터는 신사 팀의 나이 커트라인인 불혹을 넘긴 이창호 9단도 가세했지만 이 흐름은 좀처럼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올해도 양팀은 각자 12명의 선수가 확정됐는데 신사 팀은 이창호 9단과 유창혁 9단을 비롯해 안조영 9단, 김승준 9단, 이성재 9단, 서무상 9단 등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선수들이 예선을 통과해 팀에 힘을 실었다.
상대하는 숙녀 팀은 양 팀 통틀어 가장 랭킹이 높은 최정 9단이 건재하고 오유진, 김채영에 라이징 스타 조승아까지 여자 기사들 중 담을 수 있는 전력은 모두 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년 공백 김윤영, 깜짝 반전
26일 서울 성동구 바둑TV 스튜디오에서 막을 올린 개막전은 신사팀에서 김수장 9단, 숙녀 팀에서는 김윤영 4단을 선봉으로 내세웠다.
57년생인 김수장 9단은 시니어 중 가장 자기관리를 잘하고 있는 기사로 꼽힌다. 2019년 시니어바둑리그에서는 14전 전승을 거두고 팀을 정규리그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강해지는 모습을 보이며 이번 대회 예선에선 전성기 시절에도 좀처럼 넘기 어려웠던 서봉수 9단을 꺾고 본선에 올랐다.
숙녀 팀의 김윤영 4단은 2017년 하반기부터 캐나다에서 바둑 보급을 하고 있고, 그곳에서 캐나다 남편을 만나 결혼도 했다. 코로나로 인해 잠시 귀국했는데 마침 임신 사실을 알게 되어 더 머물다가 이번 대회에 출전한 케이스.
약 5년의 공백 기간은 있지만 경력은 무시할 수 없어서 2010년 부안군배 여류기성전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 한국대표로 출전하여 여자단체에서는 금메달을 목에 걸고, 최철한 9단과 함께 나간 혼성페어에서는 동메달을 따낸 실력파 기사다.
바둑은 AI시대에 어울리는 난해한 초반으로 시작됐는데 흑의 보가였던 상변에서 김윤영이 잘 타개한 뒤 좌변과 하변을 키웠고 중앙 흑 대마까지 잡으면서 승리했다.
패한 김수장 9단은 “올해는 우리 팀이 거의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웃음). (숙녀 팀은)누구 하나 만만한 상대가 없고 최정 9단까지 버티고 있어서 기가 질려 버린다(웃음)”면서 “초반에 흐름이 괜찮나 했는데 우상귀 패싸움 과정에서 말려든 것 같다. 제가 졌으니 다음에 출전하는 유창혁 9단이 내 몫까지 이겨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연승전은 이긴 자가 질 때까지 계속해서 대국을 이어나가는 방식이다.
김윤영은 이튿날 신사 팀 2장 유창혁 9단을 상대했다.
유창혁이 2장으로 나온 건 극히 이례적인 일. 나이 제한으로 인해 5회 대회부터 출전한 유창혁이 두 번째로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최근 지지옥션배 흐름을 보면 신사 팀에서 나이 많은 전력이 약한 기사들이 먼저 나와 연패를 당하면서 초반 숙녀 팀에게 흐름을 내주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를 의식한 것으로 해석되는 조기 출전이었다. 즉 초반에 기선제압을 해보겠다는 의도.
하지만 신사 팀과 유창혁의 바람은 김윤영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유창혁 사범님께는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다”던 김윤영은 과거 ‘세계 최고의 공격수’라는 별칭을 갖고 있던 유창혁의 대마를 맹공격, 대국 시작한 지 1시간 40여분, 150수만에 불계승으로 끝냈다.
해설의 양상국 9단은 “프로무대를 떠나 외국으로 건너간 선수가 5년 만에 다시 나타나 이 같은 내용을 보여준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며 김윤영의 선전을 놀라워했다.
승리한 김윤영은 “코로나 때문에 한국으로 들어왔는데 임신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어 좀 길게 머물게 됐다”면서 “그동안 몬트리올의 바둑 카페에서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그룹 레슨과 온라인 지도를 했다. 생각보다 잘 이겨서 나 자신도 좀 놀랍다. 캐나다에서 실전대국을 할 기회는 많지 않았지만 외국인들을 지도하면서 숙제를 내주고 채점하면서 계속 수읽기를 같이 한 것이 공부가 되지 않았나 싶다. 지지옥션배에선 곧 출산 예정이라 앞 순번 출전을 자원했다. 2승만 하면 만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다음 대국부터는 보너스라고 생각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두어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승리 소감을 말했다.
반면 패한 유창혁은 “수읽기에서 계속 착오가 나오면서 못 본 수가 반복해서 나왔다. 시니어 기사들은 대국 수가 많지 않아 갑자기 나와 대국하면 바둑을 잘 짜지 못한다. 그래서 일찍 나오면 좀 낫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너무 일찍 떨어졌다”고 아쉬워했다. 기세를 타고 있는 김윤영을 상대로 시니어들이 어떤 전략을 들고 나올지 궁금하다.
지지옥션이 후원하고 한국기원이 주최하는 제15기 지지옥션배 신사 대 숙녀 연승대항전의 우승상금은 1억2000만원이다. 3연승 시 200만원의 연승상금이 지급되며, 이후 1승당 100만원의 연승상금이 추가로 지급된다.
생각시간으로 각자 20분에 1분 초읽기 5회를 준다. 전기 대회에서는 각각 4연승씩을 거둔 박지연 5단과 이민진 8단의 활약으로 숙녀팀이 12-8로 승리했었다.
■ 제15기 지지옥션배 신사 대 숙녀 연승대항전 선수 명단
신사팀
유창혁 이창호 최명훈(이상 시드), 차민수 김수장 최규병 김동면 안조영 한종진 김승준 서무상(이상 예선통과), 이성재(후원사 시드)
숙녀팀
최정 오유진 김채영(이상 시드), 조승아 오정아 유주현 김윤영 조혜연 강다정 이영주 박지은(이상 예선통과), 허서현(후원사 시드)
유경춘 바둑평론가
대학졸업 후 첫 직장인 주간바둑신문 입사 이후 줄곧 바둑계에서 바둑전문기자로 활동해왔다. 월간 바둑세계 편집장, 넷마블바둑 컨텐츠팀장 등을 거쳐 현재는 (사)대한바둑협회 홍보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