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립 의견 없이 무조건 찬성 아니면 반대
책임지기 싫은 KT건 수탁위에 떠넘길 듯
공적연금 행동주의 vs 헌법 126조 위반?

지난해 2월 9일 국민연금공단 충정로사옥 앞에서 민주노총, 참여연대 등이 연 기자회견. 참가자들이 '정기주주총회에서 국민연금의 적극적 주주권 행사'를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2월 9일 국민연금공단 충정로사옥 앞에서 민주노총, 참여연대 등이 연 기자회견. 참가자들이 '정기주주총회에서 국민연금의 적극적 주주권 행사'를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국민연금공단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가 모든 구성원을 갖추고 3월 주주총회 대비 태세를 갖췄다. '주인 있는 기업' '주인 없는 기업' 가릴 것 없이 재계 내 경영권 분쟁이 격화되고, 행동주의 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방향에 관심이 집중된다.

16일 국민연금은 의결권행사 자문기구인 2기 수탁위 구성을 마치고 이날 첫 회의를 열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최근 재계 추천 인사인 한석훈 전 성균관대 로스쿨 교수를 새로운 상근전문위원으로 영입했으며, 지역가입자 추천 신왕건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와 노조 추천 원종현 전 국민연금연구원 부원장을 재선임했다.

2기 수탁위는 총 9인으로 구성됐다. 신왕건 수탁위원장을 비롯한 상근전문위원 3인과 재계 추천 권재열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장, 노조 추천 이연임 금융투자협회 부부장, 지역가입자 추천 이상민 법무법인 에셀 대표변호사가 활동한다. 이와 함께 이인형 자본시장연구원 부위원장, 강성진 한반도선진화재단 정책위의장, 연태훈 증권시장안정펀드 공익위원이 전문가 추천 위원으로 참여한다.

외견상으로 수탁위는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독립의결기구다. 다만 국민연금이 약 12% 이상의 지분을 보유하거나 내부적 판단이 어려운 기업의 경영 사안에 대해 찬반 결정을 떠맡기는 방식이어서 중립적 포지션을 취하기가 어렵다.

김원이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민연금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2017∼2022년 국민연금 지분 10% 이상 보유 기업의 주주총회 안건별 찬성·반대' 자료를 보면 평균 찬성률과 반대율의 총합은 95.5%로 기권·미행사·불통일행사(다수의결권 찬성·반대 분리), 중립은 4.5%에 불과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국민연금의 적극적 주주권 행사를 강조해오고 있다. 서원주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CIO)은 "KT와 포스코, 금융지주 등 주인 없는(소유 분산) 기업 최고경영자(CEO) 선임 과정이 합리적이고 투명하게 이뤄져야 주주이익에 부합할 수 있을 것"이라며 개입을 시사한 바 있다.

당장 17일 주주총회를 여는 포스코홀딩스의 사내이사 선임건이 관심사다. 정기섭 사장(전략기획총괄), 유병옥 부사장(친환경미래소재팀장), 김지용 부사장(미래기술연구원장) 등 3명의 사내이사 선임 안건이 다뤄질 예정인데, 여권 내에서 최정우 체제 반대 기류가 형성되면서 어떤 선택을 할지 관심이 모아진다.

국민연금은 포스코홀딩스 제1대 주주지만 지분 비율이 8.05%로 낮은 편이다. 금융지주 중에서는 우리금융그룹 임종룡 회장 신규 선임 안건이 오는 24일 주주총회에서 다뤄지는데 국민연금 보유지분은 지난해 대비 1.02% 줄어든 6.84%이다. 이에 두 회사에 대한 의결권 행사는 수탁위까지 가지 않고 기금운용위원회가 자체적으로 각각 반대와 찬성 결정을 내릴 것으로 예상된다.

단 오는 31일 KT 주주총회 의결권 행사는 2기 수탁위에 떠맡겨질 가능성이 높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말 기준 KT 지분 10.12%를 가진 제1대 주주다. 앞서 국민연금은 구현모 전 KT 대표의 연임 반대 입장문을 발표하면서 경영 개입을 본격화했다. 김성태 전 원내대표를 사장으로 진입시키는데 실패한 국민의힘 의원들도 윤경림 사장 후보 실명을 거론하면서 반대 의사를 내비치고 있다. 이에 더해 친윤 인사인 김경율 회계사까지 "주인 없는 회사 KT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이른바 '공적연금의 행동주의'를 압박하면서 2기 수탁위원들의 심리적 부담이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국민연금의 주식의결권 행사는 기금운용본부 투자위원회에서 1차로 결정되고 투자위에서 결정하기 어려운 사안들은 전문위가 2차로 넘겨받아 최종 심의·의결을 하는 구조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관련 의결권 행사 당시 수탁위 등에선 합병에 반대표를 던질 가능성이 높았지만, 국민연금은 2015년 7월 10일 투자위원회 단계에서 합병 찬성을 결정해 버렸다.

국민연금 지배구조도. 기금운용에서 의결권 행사까지 보건복지부의 지배를 받고 있다.
국민연금 지배구조도. 기금운용에서 의결권 행사까지 보건복지부의 지배를 받고 있다.

정치금고화 비판 원인 제공한 수탁위
금융전문가 3명 포함시켜 체질 개선?
KT 둘러싼 여권·대통령실 압박 변수

문재인 정부 시절에도 경영개입 사례가 많다. 2019년 1월 16일 기금위 위원장인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한진그룹 회장 일가의 땅콩회항, 갑질폭행, 탈세 의혹 등을 일탈 행위로 지적하며 "대한항공과 한진칼에 공정한 주주권을 행사하겠다"고 언급한 것이다.

당시 국민연금은 대한항공 지분 11.7%를 가진 2대주주 위치였는데 조양호 전 회장 연임안에 대해 반대의결권을 행사한 결과 조 전 회장은 연임에 실패했다. 자국기업 보호라는 애국심에 힘입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개입과 마찬가지로 한진그룹 일가에 대한 비난 여론에 편승한 오너 갈아 치우기였다. 본지는 앞서 [퇴출! 구석기 법령] 이재용 승계 개입에 정치 금고화···목적 망각한 국민연금 기금운용 편을 통해 정부가 사영기업의 경영을 통제 또는 관리하는 것이 헌법 제126조 위반이라는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다만 심각한 경영 통제 목적이 아니라면 국민연금의 적극적 의결권 행사가 실정법상 불법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한석훈 상임전문위원은 문형표 전 장관의 지시가 '부당한 압력'이라는 서울고등법원 판결과 관련해 "기금의 관리·운용 책임을 맡고 있는 보건복지부가 그 위탁자의 입장에서 정당한 지시나 지도를 한다면 공단은 이에 따라야 할 의무가 있다"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정작 국민연금은 지금까지 기금운용 전문가가 아닌 정부 인사 또는 시민단체 등 이해관계자 대표들로 수탁위를 구성해 정치권 입김이 반영된 경영개입을 자행해 왔다. 지난해 수탁위가 현대자동차·GS건설·롯데하이마트 등 20~30개 기업에 기업가치 훼손을 이유로 주주대표소송 서한을 보내면서 압박을 가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다만 이번 2기 수탁위엔 비상임위원 3명 중 1명을 금융전문가로 포진시키면서 정치 현안보다 주주가치 증대에 활동의 초점이 맞춰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김원식 건국대 명예교수는 "기업의 건전한 경영을 실질적으로 유도하기 위해서는 (행동주의에 입각한 경영참여보다는) '월스트리트룰'을 적용해 투자 기업에 문제가 있다면 주식을 전량 매각하는 방식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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