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기업 추격으로 현지 수요 사실상 제로
美·日 장비 반입 금지로 업그레이드도 멈춰
5년 전 왕윤종 경제안보비서관 우려 현실화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 2019년 5월 중국 상하이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상하이 포럼'에서 개막 연설을 하고 있다. /SK그룹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 2019년 5월 중국 상하이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상하이 포럼'에서 개막 연설을 하고 있다. /SK그룹

주력 생산품인 메모리 반도체 위기를 맞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나란히 감산에 돌입했다. 글로벌 경기 침체로 인한 재고자산 급증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다. 이런 가운데 미국이 반도체 공급망 규제를 이전보다 강화하면서 중국 현지에 볼모로 잡힌 생산공장이 애물단지로 떠올랐다.

2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지난해 4분기 영업손실이 1조712억원을 기록했다고 공시했다. 삼성전자도 메모리 반도체 업황 악화로 영업이익 96%가 급감하는 어닝쇼크를 맞았다. PC와 스마트폰 등의 수요 부진으로 메모리 수요가 줄고 제품 가격이 큰 폭으로 하락한 탓이다. 특히 모바일 기기의 내장형 저장장치로 사용되는 낸드플래시가 직격타를 맞았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분기 적자를 기록한 SK하이닉스는 전체 매출에서의 메모리 반도체 비중이 90%가 넘는 탓에 가전 사업까지 포괄하는 삼성전자보다 충격이 더 컸다. SK하이닉스는 투자와 비용을 줄이고, 성장성 높은 시장에 집중하겠다는 전략을 밝혔다. 

삼성전자도 사실상 감산에 돌입했다. 기존 라인들에서 장비 보수 및 재배치를 통한 최적화를 실시하고, 레가시 공정설비를 최첨단 미세공정으로 전환하는 동시에 연구개발(R&D)용 엔지니어링 웨이퍼 투입을 늘리겠다는 것.

장비를 보수하고 재배치하는 동안 웨이퍼 처리량이 감소하고 레가시 공정을 최첨단 공정으로 전환하는 기간 생산량이 감소하는 효과가 발생하고, R&D용 엔지니어링 웨이퍼 투입량을 늘리면 양산 웨이퍼 투입량이 그만큼 줄어든다.

증권가에선 그럼에도 삼성전자가 1분기 1조원이 넘는 영업손실을 입을 것으로 예상되고 SK하이닉스도 이번 적자가 바닥이 아닐 것이란 분석이 대체적이다. 중국 현지 생산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메모리 반도체 실적 부진이 기술적 감산만으로 해결되기는 역부족이란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미국의 제재로 중국 내에선 첨단·고사양 반도체 생산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중국 업체의 추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외신에 따르면 미 상무부는 최근 화웨이에 수출하는 미국 기업에 더는 수출 라이선스를 부여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통보했다. 수출이 전면 금지되는 시기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퀄컴과 인텔과 같은 미국 회사들의 중국으로의 수출이 전면 금지되는 상황이 머지않은 셈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2020년 중국 시안반도체 공장을 방문해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삼성전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2020년 중국 시안반도체 공장을 방문해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삼성전자

중국에 생산공장 편중된 게 위기 원인
10조원 넘던 시장 모두 사라지는 상황

지난해 10월 미국 상무부가 중국에 대한 반도체 장비 수출 금지 조치를 처음 내릴 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대해선 유예 조치를 했지만, 영원히 미룰 수도 없는 상황이다. 반도체 장비를 생산하는 일본(도쿄일렉트론)과 네덜란드(ASML)가 대중 수출 규제에 참여하면서다.

결국 재계 안팎에선 "삼성전자 중국 시안 낸드플래시 공장과, SK하이닉스 우시 D램 공장이 중국에 볼모로 잡혀있다"는 5년 전 왕윤종 대통령실 경제안보비서관의 우려가 현실이 됐다는 볼멘 목소리가 나온다. 또 메모리 반도체의 주요 생산 기지가 중국에 편중된 것이 실적 위기와 기술 추격이란 협공을 허용하게 된 원인이라는 지적과 함께다.

삼성전자 중국 시안 공장의 낸드플래시 생산량은 삼성전자 전체 출하량의 40% 이상을 차지한다. 세계 생산량의 15% 비율이다. SK하이닉스가 지난 2020년 10월 인텔로부터 인수한 중국 다롄 공장도 낸드플래시가 주력 품목이다. 이 밖에도 SK하이닉스는 중국 우시성에 법인(SK hynix Semiconductor China) 생산 공장을 지어 2006년부터 D램을 생산하다 최근엔 파운드리까지 사업을 확장했다.

미국의 대중 제재는 지난 2020년 9월 15일부터 화웨이테크놀로지에 대한 5G 통신 네트워크 관련 장비 수출 금지와 함께 시작됐다. 지금까지 나머지 관련 없는 기술 수출은 용인해왔지만, 반도체 장비의 업그레이드와 수혈이 어려워지면 추격하는 중국 업체로부터 따라잡히는 것은 시간 문제다.

미국의 화웨이 규제 직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매출 가운데 화웨이 비중은 각각 3.2%(7조3000억원)와 11.4%(3조원)였으니 적어도 10조원이 넘는 시장을 잃는 셈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미국의 반도체 규제 전후로 중국내 시장점유율을 분석한 결과 2018년에 비해 2021년 한국의 점유율은 5.5%포인트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같은 기간 대만의 점유율은 4.4%포인트, 일본은 1.8%포인트 증가했다.

메모리 반도체 업황 침체와 동시에 미국의 규제에 따른 중국 대기업의 한국산 메모리 구매 중단이란 협공에 직면한 것이다. 실제로 중국 기업인 YTMC는 낸드플래시 부문에서 삼성전자를 추월하는 기술력을 보이고 있다. 지난 1일 반도체 박람회인 세미콘코리아 2023에 참석한 최정동 테크인사이츠 박사는 "최근 YMTC가 232단까지 쌓아 올린 3D 낸드플래시를 판매하고 있다"며 현재 이 정도 적층 기술이 들어간 낸드플래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선 구매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중국은 2015년 반도체굴기를 천명하고 국가역량을 총동원해 자급자족률을 높이고 있다. 그 결과 중국 반도체 기업의 2018년 대비 2021년 매출액은 61.0%, 생산량은 94.0% 증가하는 초고속 성장을 보여주고 있다. 스탠다드앤드푸어스(S&P) Capital IQ가 집계한 시가총액 기준 세계 100대 반도체 기업 가운데 한국은 2곳에 불과한 반면 중국은 41개사로 나타났다.

결국 국내 경영진은 중국 현지 공장의 가동률을 줄이는 울며겨자먹기식 감산을 단행하면서 출구전략을 모색하는 상황이다. 장비 반입이 없어도 공장을 계속 가동하겠다던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지난해 4분기부터 중국내 SK하이닉스 생산라인에서 웨이퍼 투입량을 50% 가까이 줄이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대중 제제가 본격화된 2020년 이재용 회장이 중국 시안공장을 직접 방문하면서 현지 투자에 애착을 보였던 삼성전자에서도 전략 변화가 감지된다. 김재준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부사장은 "국내외를 망라한 신규 생산거점 확보에 대해 다양한 조건과 가능성을 열어놓고 여러 사항을 고려해 검토해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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