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너머로 아침해가 떠오르고 있다. / 연합뉴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너머로 아침해가 떠오르고 있다. /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 24일 중국 청두에서 갖은 회담이 무위로 끝나자 경제계는 말 못하는 허탈에 빠졌다. 한·일 간의 태풍급 갈등을 겪는 가운데 15개 월 만에 열린 정상회담인 만큼 관심과 기대가 모아졌기 때문이다. 만남 자체나 대화를 이어가자는 공감대에 의미를 두는 측도 있으나 양국의 갈등이 워낙 엄중해서 갈증과 답답함은 여전하다.

45분 간의 회담에서 문 대통령은 아베 총리에게 수출규제조치를 지난 7월 이전 수준으로 회복해 주기를 거듭 요구했고, 아베 총리는 강제징용 문제를 한국 측 책임으로 해결하라고 응수했다. 벼르고 별러온 자리에서 기왕의 입장만을 되풀이한 꼴이므로 해결의 의지와 진정성마저 의심스럽다. 물론 국제분쟁의 매듭을 단칼에 자르기는 어렵겠지만 정상급 타협에서 협상이 서로 주고 받는 것이라는 상식도 보이지 않았다. 일본은 회담 전에 일부 규제의 연기라는 시늉이라도 취했지만, 한국은 대안없이 조르기와 공세에만 매달린 형상이다.

일본이 정밀소재 수출규제의 명분으로 제3국으로의 유출을 내세웠지만 문재인 정권의 위안부 협약 파기와 법원의 징용 판결에 반발해 취한 조치임은 불문가지이다. 상대의 주장은 외면하고 요구만 계속한다면 합의는 요원하다. 명분을 살리면서도 상대의 태도를 돌릴 방안을 제시하는 준비의 부족이었다. 지소미아 폐기와 같은 강수나 압박만으로는 해결을 기대하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문 대통령이 이날 아베 총리에게 “두 나라가 잠시 불편해도 결코 멀어질 수 없는 사이”라고 말한 것은 집권 이후 계속 이어온 날선 반일 행보와는 조금 다른 레토릭이다. 문 정권은 상해 임시정부수립의 100주년 기념일을 게재로 기회만 있으면 독립운동과 민족주의를 대대적으로 부각시켜 정치이념으로 활용했고, 친일 족적도 속속들이 들추어냈다. 두 나라 정상이 국제무대에서 조우해도 서로 본체만체해왔다.

아베 총리도 반한 감정을 유도해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데에 몰두해왔다. 일본인들의 한국에 대한 비호감도가 80%까지 치솟은 현상은 기록적이다. 두 정상이 겨루기나 하듯이 경쟁적으로 민족주의를 부추켜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대중선동의 정치를 펴온 것이다. 역사의 시계를 되돌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양국 관계의 악화에 따른 경제계의 속앓이는 심각하다. 일본이 지극히 제한된 품목의 규제를 완화했고, 나머지 대부분 품목에 대한 규제의 데드라인이 임박하고 있어서 업계의 불안은 날로 높아지고 있다. 소재 생산의 자립을 고취하고 있지만 한국의 기술 수준으로는 쉬운 일이 아니다. 관광 업계와 다른 수출입 업계의 신음소리도 크다. 경제가 국가 간의 기 싸움으로 날아든 돌을 맞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최악으로 나빠진 양국관계를 개선하려면 언설만이 아니고 행동으로 성의를 표시해야 치유가 시작된다. 공을 들여야 피드백도 돌아오는 것이 화해의 원리이다. 상대에게 인색하고, 이기적으로 자기 주장만 관철하려는 태도는 외교가 아니다. 국가의 자존심과 국익을 손상해서도 안 되지만, 일본은 세계 2~3위의 경제 대국이므로 가볍게 보고, 우리 페이스로만 압박하기에는 버거운 나라임도 인식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의 대일 강경 노선은 정권을 둘러싸고 있는 진영의 이념적 산물이다. 운동권과 자주파의 체질은 투쟁적이고, 목적적이며, 타협보다 승리만을 최선으로 여기는 성향이 있다. 일본에게서는 아직도 가해자의 이미지가 어른거리며, 북방 노선을 훼방하는 미국과 한패라는 인식이 덧칠해져 있다. 일본을 국제기구에 제소하고, 지소미아 폐기를 밀어부치는 등 공격적으로 대응한 정부의 태도는 협상보다는 싸움에 치중하는 강경파의 입김이었다. 강대강 충돌은 결국 양측에 모두 손해를 입혔을 뿐이다.

문 정권의 독특한 이념정치는 태생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정권 출범을 밀어준 세력이 의식화된 운동권과 시민단체, 민노총, 전교조, 그리고 진보성향의 각종 강성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이념은 응집력이 강하며, 전투적이다. 국가경영의 지속성이나 전문가들의 견해들은 우선 순위에서 번번히 밀린다. “가보지 않은 길”의 앞에는 걸림이 없어야 한다고 본다. 국가경영 차원의 우려도 안중에 없다. 탈원전과 소주성론, 북한을 의식한 안보태세의 수위조절은 내외의 우려에도 막무가내였으며, 지금 뜨겁게 달아오른 선거법 개정과 공수처 설치법도 같은 흐름을 타고 있다.

아무리 간절히 추진한 정책이라도 국민의 상당 수가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치열하게 반대하면 타협과 협상을 벌이는 게 민주주의 방식이다. 권위주의 시대에 저항한 세력이 현재의 집권 진용에 포진해 있지 않은가. 아픈 전철을 밟으려 하고 있다는 지적을 외면하면 정치는 다시 무서운 업보를 짊어지는 형국을 피하기 어렵다.

패스트트랙으로 통과된 국회의원 선거법은 여권이 공수처법안을 통과시키려고 군소정당에게 유리하도록 설계한 난삽한 퍼즐임이 뻔하다. 국민이 이해하기도 힘든 룰로 의회에 보낼 대표를 뽑는 것은 누가 봐도 어불성설이다. 200년이 지나도록 조롱받고 있는 게리맨더링보다 더 악평을 들을 지 모른다. 1812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서 게리 지사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선거구역을 조정해 선거를 치름으로서 놀림을 받았고, 교과서에도 올려져 대통령까지 지낸 게리와 그 사례가 아직도 지탄을 받고 있지 않은가.

공추처설치법도 정치적 반대자와 미운털을 제압하려는 의도라고 다수의 국민들이 반대하고 있으면 당연히 논의에 논의를 거듭해서 보완, 또는 미루어야 정상이다. 친문 세력이 공수처 반대 의원을 SNS로 집단 포격하는 작태는 비문명적이다. 무시 못할 반대를 무릅쓰고 물리적으로 강행하면 갈등의 골은 깊어지고, 막대한 국가적, 사회적 손실을 낳을 수 있다. 무리하게 마련된 법은 운영과 앞날도 불투명해진다. 이럴 때야 말로 소신보다 “정무적 판단”이 절실하다. 법안에 깊이 간여한 조국 전 민정수석이 언급한 자의적인 정무판단이 아니고, 대국적이고 건설적인 정무판단이 국가의 혼란을 예방할 것이다.

상대에게 인색하면 절대로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없다. 인색한 정도가 크면 클수록 융화와 상생은 더 멀어져 간다. 포용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갈등은 깊어지고, 비용은 늘어난다. 더구나 지도자가 인색하면 조직이나 사회, 국가의 불행을 부른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 의견으로 본보의 의견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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